최철의 오페라 오디세이>‘세기의 스캔들’…왕실 여인들의 처절한 암투 <안나 볼레나>
도니제티 여왕 3부작 중 첫 작품
16세기 영국 헨리 8세 왕실 배경
‘소프라노 기교’ 벨칸토 오페라
강렬한 스토리·수려한 선율 조합
오레라 ‘안나 볼레나’ 1막 중 안나역의 소프라노 안나 넵트렌코가 열연을 펼치고 있다. 출처 뉴욕메트로폴리폴리탄 |
오페라 <안나 볼레나-Anna Bolena, 1830>는 <마리아 스투아르다, 1834>, <로베르토 데브뢰, 1837>와 더불어 도니제티의 여왕 3부작 시리즈 오페라 중 하나로 첫 번째 작품이다. ‘안나 볼레나’라는 제목은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생모 앤 불린(Anne Boleyn)의 이탈리아어 표기로 내용은 시녀였던 앤 불린이 여왕이 된 후 죄를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는 비극적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페라 ‘안나 볼레나’ 1막 중 안나역의 소프라노 안나 넵트렌코가 열연을 펼치고 있다. 출처 뉴욕메트로폴리폴리탄 |
훗날 호사가들에게 앤 불린의 드라마틱한 삶은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이 때문에 문학작품으로서도 자주 만날 수 있는 소재이다. 특히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필리파 그레고리의 소설 ‘천일의 앤 불린’을 원작으로 한 국내 개봉작 나탈리 포트먼, 스칼렛 요한슨, 에릭 바나 주연의 영화 ‘천일의 스캔들’과 미드(미국 드라마)로 인기를 끌었던 ‘스페인 공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스토리이기도 하다.
도니제티의 여왕 3부작 시리즈 오페라 중 첫번째 작품인 ‘안나 볼레나’ 공연 모습. 출처 뉴욕메트로폴리폴리탄 |
앤 불린은 당대의 여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파격적이라 할 정도로 거침없고 당돌한 여성이었다. 대담하기까지 한 그녀는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미녀였으며, 유럽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지녔다. 어려서부터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타고난 두뇌 역시 명석하여 언어뿐만 아니라 철학과 신학을 두루 섭렵하여 당대 왕을 비롯한 지성인과 열띤 토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이며, 야심과 재치가 넘치는 특별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가 되기 전 첫 번째 왕비였던 카탈리나의 시녀였으나 교묘하게 헨리의 마음을 유혹하여 카탈리나를 몰아내고 헨리의 두 번째 왕비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헨리가 바라던 아들이 아닌 훗날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만 낳고 몇 차례 유산을 거듭한 끝에 결혼 3년 만에 헨리에게 버림받아 참수형을 당하며 그녀의 드라마틱한 인생 여정은 막을 내린다.
안나 볼레나 중 안나역을 맡은 소프라노 안나 넵트렌코(오른쪽). 출처 뉴욕메트로폴리폴리탄 |
16세기 영국 왕실의 실화를 배경으로 하는 <안나 볼레나>는 펠리체 로마니(Felice Romani)의 대본을 기반으로, 1830년 12월 26일 밀라노의 카르카노 극장에서 초연하였다. 이 작품은 헨리 8세가 두 번째 왕비인 안나 볼레나와 세 번째 왕비가 되는 조반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안나에게서 아들을 얻기를 원했던 헨리 8세는 엘리자베스 1세를 낳은 뒤 아들을 사산하자 첫 번째 여왕이었던 캐서린(카탈리나)과 같은 이유로 안나와 이혼하려 한다. 헨리 8세는 안나의 시녀 조반나와 결혼을 위해 안나에게 이혼을 요구하면서 그녀에게 간통죄라는 누명을 씌운다. 그리고 헨리 8세는 안나에게 죄를 인정할 것을 종용하면서 이와 함께 이혼에 동의하면 목숨을 살려준다고 제안하지만, 안나는 딸 엘리자베스의 왕권 상속을 위해 이혼을 거부하고 결국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내용이다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 역시 그의 작품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함께 벨칸토 오페라의 정수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안나 볼레나>의 초연을 본 벨칸토 오페라의 대가 빈첸초 벨리니는 너무 감격해서 자신이 쓰던 오페라 <에르나니>의 악보를 찢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엄청난 성공을 거둔 도니제티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초연이 성공한 것은 당시에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던 앤 불린의 이야기가 지닌 강렬한 스토리와 여기에 이를 수려한 선율 속에서도 장엄함을 잊지 않게 한 탁월한 음악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초연 당시 안나 역에 유럽 최고의 성악가라 불렸던 소프라노 주디타 파스타의 절묘한 기교를 극한으로 몰고 간 힘 있는 연주가 함께했기 때문이며, 200년 전의 당시의 실황은 호사가들에 의해 지금까지 명연주로 회자 되고 있다.
엔리코 역의 니콜라 로시 레미니와 안나역의 마리아 칼라스. 출처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 |
하지만 이 작품 역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처럼 초연 이후 인기가 급속히 쇠퇴하였다. 그 이유로는 관객들이 강력한 사운드와 극렬한 표현의 19세기 사실주의 오페라를 더 선호하고 반대로 프리마돈나인 소프라노의 기교에 큰 비중을 둔 벨칸토 오페라에 관하여 관심이 사그라들며 점점 무대에서 <안나 볼레나>는 볼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대중에게서 점점 잊히며 사장될뻔한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는 세기의 소프라노인 마리아 칼라스와 함께 부활하게 된다. 1957년 4월 14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올려진 마리아 칼라스의 <안나 볼레나>는 숱한 화제를 낳았다. 지금도 전설로 추앙받는 마리아 칼라스의 안나(앤 불린)는 그녀가 벨칸토 오페라의 단점으로 거론되었던 단순한 기교만을 자랑하는 연주가 아니라, 마치 오페라에서 실물의 앤 불린을 만난 것 같은 극적인 연기와 폭발적인 표현을 무대에서 선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칼라스가 부른 앤 불린의 마지막 장면은 역사가 기억하는 최고의 안나라는 평을 끌어냈다. 당시 마리아 칼라스의 연주를 본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관객들은 휘몰아치는 감동에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갑자기 소멸한 <안나 볼레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등 도니제티의 벨칸토 오페라들의 회생은 도구화된 기교로 평가받던 여주인공의 노래에 집중되었던 시선을 더 밀도 있게 인물의 본질을 최대치까지 끌어내 극화한 마리아 칼라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부활한 <안나 볼레나>는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로 불리던 레일라 젠체르, 엘리나 술리오티스, 비벌리 실즈, 몽셰라 카바예, 조안 서덜랜드, 마리엘라 데비아, 에디타 그루베로바, 안나 넵트렙코 등이 명품 안나로 무대에서 빛을 발하며 <안나 볼레나>는 세계 오페라 무대의 주요 레퍼토리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필자 역시 2011년 안나 넵트렙코의 <안나 볼레나>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직관할 수 있었다. 안나 역은 기교와 극한의 연기뿐만 아니라 분량 면에서도 거의 쉬지 않고 무대에 출연하여 고난도의 기량을 펼쳐야 하므로 체력과 집중력 역시 많이 필요하다. 이날 안나 역의 넵트렙코는 엄청난 연주력과 밀도화된 연기로 관객의 기립 박수를 유도하며 그가 왜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인지 각인시켜 주는 무대였다.
필자는 <안나 볼레나>를 영화나 연극, 문학에서 볼 수 있는 탄탄한 스토리가 돋보이기보다는 오페라의 많은 부분이 여주인공인 안나 역에 집중되어 있다고 볼 정도로 프리마돈나에게 의존성이 과다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안나 역에 캐스팅된 소프라노의 컨디션에 따라서 작품의 성공이 좌지우지되기도 되고, 소프라노들에게는 프리마돈나로 인정받을 수 있는 보증수표와 같은 작품으로 알려진 작품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 배역에 집중화된 작품의 성패에 과감히 투자하기 어려울 것으로 사료 되며 그래서 국내 무대에선 자주 볼 수 없는 작품일 것이다. 필자의 기억 속엔 14년 전 뉴욕에서 만난 <안나 볼레나>의 프리마돈나 ‘안나 넵트렙코’의 2막의 마지막 명장면은 어떤 오페라서도 볼 수 없는 소프라노의 최고의 독백이라고 생각한다. 시간 예술로서 잊혀질 수밖에 없는 오페라의 명장면, 저자에게 지금까지도 잔잔한 외침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그때의 무대를 더 능가하는 소프라노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광주시립오페라단 예술감독·문화학박사
한 장의 명반 : 안나 네트렙코(안나 볼레나), 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헨리 8세), 엘리나 가랑차(조반나 시모어), 프란체스코 멜리(리카르도 퍼시) / 에벨리노 피도 지휘 / 빈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 에릭 제노베제 연출 / 2011년 빈 국립오페라극장 실황 DV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