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유전자·박재항>생성형AI와 필기시험
박재항 서경대 광고홍보영상학과 교수
2025년 06월 24일(화) 17:14 |
![]()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5 메타버스 엑스포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아메타가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국제도서전에 관심이 워낙 쏠려서 조용히 넘어갔는데, 코엑스에서는 다른 전시회도 열리고 있었다.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일과 같은 날에 ‘메타버스 엑스포 2025’라는 전시회도 3일 동안의 일정을 시작했다. 2017년 ‘서울 VRAR 엑스포’로 출발해 2022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꾼 정보통신(IT) 분야에서는 첨단을 걷는다고 하는 꽤 규모와 역사를 갖춘 전시회다. 올해는 종이책을 주요 소재로 한 전시회에 밀려서, 관련한 기사를 찾기가 힘들 정도다.
두 전시회의 흥행이 크게 차이가 난 원인은 무엇일까. 위에서 언급한 유명인의 출연 외에 도서전을 두고, 종이책을 읽는 것을 멋지게 생각하고, 관련 사진이나 영상을 SNS에 공유하는 ‘텍스트 힙(text hip)’ 트렌드의 영향을 얘기한다. 메타버스는 챗지피티를 비롯한 인공지능(AI) 열풍으로 구시대의 용어가 돼버렸다고 한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이 강제된 상황에서 메타버스가 세상 모든 것을 바꿀 것처럼 과장되고, 남용되어 피로감이 쉽게 온 까닭도 있다.
현실에서는 AI, 메타버스를 모두 아우르는 디지털의 큰 물결이 종이책을 비롯한 아날로그의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한 지인이 대학생 조카와 유료 생성형AI 계정을 공유해 사용하게 되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조카가 생성형AI를 어떻게 사용했는지도 볼 수 있었다. 교재의 각 장에 나온 모든 주제의 요약, 중요사항 추출, 시험문제 예시 등을 물어보고, 리포트도 물론 생성형AI를 이용해 작성한다고 했다.
학생들은 모두 생성형AI를 사용해 리포트를 쓰는데, 교수만 모른다고 하는 대학생이 있었다. 많은 교수들도 생성형AI를 쓰는데, 디지털 활용 부문에서 교수들을 능가하는 학생들의 사용 사실을 모르는 교수들이 있겠는가. 생성형AI에서 얻은 결과를 그대로 옮기는, 곧 ‘복사하여 붙여 쓰는’ 소위 ‘복붙’을 막는 방법이 교수들 대화의 단골 화제가 된 지 오래다. 표절검사를 돌리거나 사용 AI의 이름을 쓰거나 화면을 함께 제출하라는 등의 대응책을 쓰기도 하나 한계가 있다.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불신감을 깔고 대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사실 복붙의 문제는 생성형AI에서 멀리 가 인터넷 초기부터 있었다. 컴퓨터로 글을 쓰기 이전 종이책의 시대에도 베껴쓰기는 자주 논란거리가 됐다. 자료의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아무런 분석도 하지 않은 채, 상당 부분을 그대로 자신의 저작인 양 가져다 쓰면 안 된다는 건 학문하는 기본 태도다. 인간의 노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본 태도를 어기기가 갈수록 쉬워지고 있다. 그렇게 생성형AI가 내놓은 대답을 복붙하는 최소한의 노력이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다. 더욱 심각하게는 복붙한 내용을 자신이 아는 것으로, 곧 자신의 지식인 양 착각하게 된다.
‘미스터 마케팅(Mr. Marketing)’이란 별명으로도 유명한 경영학의 태두 필립 코틀러 선생과 그의 부인인 낸시 코틀러 여사와 두 분의 겨울 주거지인 미국 남부 플로리다 주의 새라소타라는 도시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 낸시 코틀러 여사가 그 즈음에 새라소타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인 탬파베이까지 한 번도 직접 차를 몰고 간 적이 없다가, 내비게이터가 나오고 용기를 내서 혼자 운전해서 다녀오는 데 성공했다는 말을 했다. 신기술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처음에는 자랑처럼 말씀을 하셨는데, 이렇게 끝맺었다.
“그런데 중간에 뭐가 있었는지는 전혀 모르겠더라고.”
코틀러 여사는 적어도 내비게이터 화면 밖의 것들은 자신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행객들의 상당수가 스마트폰에 켜진 지도앱과 SNS플랫폼 등에 오른 사진이나 다른 이의 경로만 보면서 여행을 한다. 자신의 사진이나 영상들을 쉴 새 없이 올리기도 한다. 그들 중 상당수가 다녀온 지역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한 대학 연구자가 미술관 관람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쪽에는 마음대로 촬영하는 걸 허용했고, 다른 그룹은 눈으로 보고만 오라고 했다. 미술관에서 나온 후에 기억나는 작품들을 뽑으라 하고, 작품들에 대한 감상평을 요청했다. 사진 촬영을 한 이들이 기억하는 작품이 현저히 적었고, 기억하는 내용도 상대적으로 부실했다. 약간 다른 방식으로 같은 사람에게 15점의 그림은 사진을 찍도록 했고, 다른 15점은 눈으로만 감상하라고 했다. 사진을 찍지 않은 작품들에 대해 훨씬 풍성한 기억을 가지고 설명을 했다. 이를 두고 ‘사진 촬영 손상 효과(photo-taking impairment effect)’라는 용어까지 나왔다.
사진이나 영상 찍기가 쉬워지면서 손상도 알지 못하는 새 크게 일어나고 있다. 일상화된 손상 속에서 더욱더 찍는 행위 자체에 몰두한다. 그렇게 찍힌 것들을 잘 안다고 착각하고, 소유한다고까지 생각한다. 여행을 가거나 모임 자리에서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는데,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도 사라진 채 사진만, 그것도 0과 1의 부호로만 구성돼 그냥 저장 공간에만 남는 게 현실의 대세가 되고 있다.
도서전이 미증유의 성황에 텍스트힙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다지만, 현장에서 사진이나 영상을 찍고, 굿즈나 사는 경험으로 지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아주 작은 부문에서라도 스스로 만드는 아날로그를 실현하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필기시험을 실시했다. 코로나19가 창궐하고 마침 메타버스가 유행하면서, 내 수업의 모든 시험을 온라인으로만 봤었다. 학생들은 오픈북 형태로 생성형AI까지 맘껏 이용하지만, 종이 답안지에 손으로 써서 답을 제출해야 했다. 모니터에 뜨는 같은 폰트의 글자들이 아닌 종이 위의 각기 다른 필체들이 괜스레 반가웠다. 복붙의 간단한 마우스 작동에서 한정된 시공간 속에 손으로 글씨를 쓰며 학생들이 최소 한 번 더 내용을 되새기는 과정을 거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