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악법도 법이다"
김성수 논설위원
2025년 05월 06일(화) 17:11 |
![]() 김성수 논설위원 |
1993년, 강정인 서강대 명예교수가 한국정치학회에서 던진 이 한 문장은 교육계와 지식사회를 뒤흔들었다.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까지 실렸던 이 유명한 문장을 그는 철저히 검증했고,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원전 어디에도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플라톤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반영해 창작한 문장이었다. 이후 이 지적은 국가인권위원회와 헌법재판소 권고로 교과서에서 삭제되거나 수정됐다.
그러나 강 교수의 진짜 문제의식은 단순한 인용 오류가 아니었다. 그는 ‘비판 없는 복종’을 조장하는 사회, 권위를 묻지 않고 따르는 정치 문화를 겨냥했다. “법이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굳은 사고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그의 사상은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 ‘교차와 횡단의 정치사상’ 같은 저서에 담겼다. 민주주의란 ‘따라야 할 가치’가 아니라 ‘끊임없이 묻고 다시 세워야 할 태도’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났다. 지난 3일 향년 만 70세에 말이다. 하지만 정치권은 그의 철학을 외면한 채 법을 정쟁의 도구로 삼고 있다. 최근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인용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대법 파기환송을 두고 여야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법 판단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여당은 헌재 결정을 부정하고, 야당은 대법 판결을 ‘사법 쿠데타’라며 비판한다. 법은 원칙이 아니라 도구가 되고, 진리는 그 자리를 잃고 있다. 법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압박에 법이 휘둘리고 있다는 반증이다.
법은 권력의 하수인이 아니다. 정당하려면 사회적 합의, 시민의 권리, 헌법적 가치 위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돼야 한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법대로 하자”는 구호만 반복한다. 법이 부당하더라도 그 틀 안에 갇혀야 한다는 논리는, 소크라테스가 아닌 플라톤의 창작이며, 플라톤조차 ‘정의롭지 않은 법 앞에 시민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제는 철학을 흉내 낸 폭력일 뿐이다.
강 교수는 생전 “정치는 법 이전에 사람과 정의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지금, 사법 판단을 정략의 언어로 소비하는 정치권 모두에게 칼날이 되는 말이다. 법을 따르라는 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 법이 과연 선한가를 먼저 묻는 철학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며, 진짜 ‘법의 지배’다.
정치가 철학을 잃으면 법은 권력의 언어가 된다. 지금 한국 정치가 그렇다. 법을 권력의 칼로 휘두르는 이 시대에, 강정인 교수의 죽음이 더욱 쓰리고 침통하다.
김성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