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통신왕의 위기
김성수 논설위원
2025년 04월 29일(화) 1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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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은 1980년대 후반, 한국의 정보통신 인프라가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부터 통신 산업의 가치를 이같이 강조했다. 단순한 경영철학을 넘어, 한 시대를 관통하는 전략적 통찰이었다. 섬유와 무역으로 시작한 선경그룹은 세계 산업 구조의 흐름이 급변하는 조짐을 읽었다. 석유화학과 정보통신, 이 두 축이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사명을 SK그룹으로 전환하고 에너지와 통신으로의 대전환을 과감히 추진했다.
SK는 국가 기간산업의 한 축으로 올라서기 위해, 정치권과의 전략적 협력을 선택하기도 했다.
1988년, 최태원 회장과 노태우 대통령의 딸 노소영 씨의 결혼은 단순한 가문 간 결합이 아니었다. 선경이 국가 기반 산업의 핵심으로 자리 잡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자, 전략적 ‘혼맥 구축’이었다. 이후 노태우 정권은 선경을 에너지·통신 담당 대기업으로 지정했고, 이를 기반으로 SK는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에 성공하며 에너지 시장에 진입했다.
그 무렵, 정보통신 산업도 민영화와 구조 개편의 흐름 속에서 ‘대어’를 낚았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한국이동통신의 민영화가 추진됐고, 수많은 경쟁이 벌어졌지만 정치적 신뢰와 산업 전략을 앞세운 SK가 최종 승자가 됐다. 1994년, 선경은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며 통신 산업에 본격 진출했고, 이듬해에는 국내 최초로 CDMA 상용화에 성공하며 세계 이동통신사에 이름을 남겼다. ‘통신왕’의 등장이었다.
이후 SK텔레콤(SKT)은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과 막강한 브랜드 신뢰를 바탕으로 국내 이동통신 시장을 주도해왔다.
그러나 2025년 4월, SKT가 대형 위기에 직면했다. 회사 내부 보안 시스템이 뚫리며, 최대 9.7GB에 달하는 가입자 정보가 외부로 유출됐다. 텍스트로만 무려 9000권 분량의 책에 해당하는 방대한 양이다. 더 심각한 것은 유심(USIM) 정보까지 포함됐다는 점이다. 이는 가입자의 신원 확인, 통신 인증, 금융 거래에까지 직결되는 핵심 정보다.
그럼에도 SKT는 대규모 유출의 원인과 경위를 명확히 공개하지 않은 채, 유심 무상 교체와 택배 발송 같은 표면적인 조치에 머물렀다. 일부 고객들은 “교체한 유심이 정말 안전한지”에 대한 설명조차 듣지 못한 채 불안만 떠안아야 했다.
최종현 회장이 남긴 “정보는 곧 힘”이라는 말은, 시대를 앞서간 경영자의 혜안이었다. 수많은 기술을 앞세워 시장을 선도해온 SKT는 수천만의 고객의 소중한 ‘정보’를 지키지 못한 기업으로 전락하고 있다. ‘신뢰의 기술’을 앞세워 승승장구하던 통신왕이 창사이래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 셈이다. 김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