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파파 프란치스코’
이용환 논설실장
2025년 04월 24일(목) 17:49
이용환 논설실장
서기 1200년 경 어느 날, 유능한 기사(騎士)가 돼 세상에 이름을 날려 보겠다던 18세 소년 프란치스코가 ‘새로운 꿈’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과 재산을 버리고 떠난 가난한 여정. 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결코 흩뜨리지 않았고 되레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돌아온 고향 아시시.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인 그곳에서 그는 ‘네가 보고 있는 폐허가 된 나의 집을 수리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한다. 프란치스코 성인과 100여 개의 크고 작은 성당으로 도시 전체가 종교 건축물인 아시시의 출발이었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삶은 무소유를 위한 기나 긴 여정이었다. 예수가 열두 제자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당부하는 데 감명을 받은 그는 청빈한 삶이 곧 예수를 실천하는 길이라 믿었다. 허름한 옷과 거친 음식으로 평생을 지냈고 사랑과 평화의 정신을 전파하는 것도 그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다. 1208년 한센병 환자가 모여 사는 곳에서 검소하게 살아가며 설립한 ‘작은 형제회’나 여성의 가치를 일깨우기 위해 만든 ‘가난한 자매회’ 등도 성 프린치스코가 절대적 무소유와 평화, 인류공영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분명한 길이었다.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말라는 인사를 받는 순간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가 떠올랐다.” 지난 2013년 3월, 266대 교황에 선출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자신의 새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명명하고 교황으로 첫 미사를 진행했다. 성인(聖人)이었지만 1000년 가까이 잊혀졌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항상 검소함과 겸손함으로 살아왔던 프란치스코 교황. 그에게 사회적 소수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친근한 이웃이면서 동반자였다. 즉위 미사에서도 그는 성 프란치스코를 언급하며 ‘가장 가난하고 힘없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사랑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1일 선종하면서 그가 평생 추구했던 정의와 평화,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 다시금 세계인의 양심을 울리고 있다 . 그는 신앙과 사랑의 길을 몸소 실천하며 모두에게 깊은 영적 가르침을 안긴 지구촌의 큰 어른이었다. 지난 2014년에는 우리나라를 찾아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만난 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고 위로했다. 뻔뻔함과 몰상식이 난무한 지금 우리 사회에 주는 큰 울림이다. 낡은 구두와 소박한 차, 철제 목걸이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고, 환경 보존과 종교 간 화해에 큰 발자취를 남긴 교황. 북한과의 대화와 화해를 염원하고, 생의 마지막까지도 전쟁의 재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류에게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남긴 ‘파파 프란치스코’. 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이용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