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문학에서 무속 담론의 현대적 새로움을 찾다
444. 을화에서 무당 선녀 씨까지-김개영론
2025년 04월 24일(목) 17:05 |
![]() 김개영 소설 ‘나의 시적인 무녀 선녀 씨’ 표지. 실천문학사 |
![]() 김동리 소설 ‘을화’ 표지. 문학사상사 |
한국소설에서 무속을 다룬 사례는 극히 소수이고 내용도 제한적이다. 대표적인 작가가 김동리이다. ‘무녀도(巫女圖)’라는 단편이 발표됐다가 ‘을화(乙火)’라는 장편으로 재구성된다. 문학사상사의 한국문학대표작선집1 ‘을화 외’(김동리)의 작품해설에서 이태동은 이렇게 말한다. “이 작품은 기독교가 한국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토착적인 민간신앙과의 갈등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듯하나, 그것이 지닌 심층적인 주제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갈등 문제는 물론,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지키면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어떠한 의지를 구현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또 이렇게 잇는다. “자연과 집단, 무의식의 원초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는 신화 및 성적인 세계를 탐색해서, 그 가치를 재발견하려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을 ‘살아있는 죽은 자’의 상태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노력이라 하겠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소설가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작품의 주제들이 너무 무겁고 위압적이다. 철학이나 종교를 전제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국무속에 내포된 거대담론이라고나 할까. 구구절절 핍진한 우리네 서사들이 장황해 무겁고, 가족사에 쌓인 곡절이 애절해 신파적이다. 물론 김동리의 시대가 갖는 이들 서사의 수요를 폄훼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김개영의 ‘선녀 씨’를 견주어 오늘날의 변화를 읽고자 할 따름이다. 황석영이나 고은 등 이야기 풀이의 시대적 전망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채, 노벨문학상 한강의 시대로 풀쩍 뛰어넘어버린 풍경에 비유한다고나 할까. 김개영의 소설은 “화자의 여정은 평생 샤먼의 삶을 살았던 어머니에 대한 ‘애도’임과 동시에 ‘진정한 자기 찾기’의 과정”으로 서술된다. 거침없는 입말의 전개가 시원스러운 것은, 한국무속 따위의 거대담론을 들먹이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무당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로서의 개인사보다 현재 우리 사회가 지닌 무속 담론의 한 시선을 끌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한 평대로 무당을 시인이나 성소수자와 같은 오늘의 문제로 확장 시켰다 함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무속적 풍경의 포착을 말하는 것이다. “‘K-샤머니즘’ 현상의 배경에는 제도 종교의 쇠퇴와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이 자리하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팝콘 브레인’을 만들어내면서, 복잡한 제도 종교보다 직관적이고 자극적인 무속 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K-샤머니즘’은 종교적 믿음이라기보다는 주로 엔터테인먼트 요소로 소비되고 있으며, 서구의 ‘네오샤머니즘’과는 달리 가볍고 캐주얼한 방식으로 무속 문화를 활용하는 특징을 보인다.” 심형준이 쓴 ‘K-샤머니즘’의 부상(浮上), 그 문화사적 의미(한류몽타쥬, 2014)의 한 대목이다. 같은 저널에서 정덕현은 ‘K-오컬트의 탄생’을 말한다. “이제는 하나의 계보를 이야기해도 될 법한 세계 하나가 열렸다. 바로 K-오컬트의 세계다. 서구의 오컬트들이 악령의 등장과 이를 퇴치하는 사제들의 구마 의식을 담았다면, 무속인들이 귀신들린 자들을 위해 치르는 굿은 이제 그 독특한 세계로 세계인들을 인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오컬트를 다룬 대본이나 웹소설 등이 우후죽순 등장한다. ‘전설의 고향’ 같은 김동리식의 무속 담론 시대가 가고 ‘파묘’ 등 무속 콘텐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있는 디지털 운세 어플 등의 풍경이 이를 말해준다. 이런 컨텍스트 속에서 김개영의 ‘선녀 씨’가 갖는 위상은 무엇일까? 난삽한 오컬트 소재 시대의 청량한 시 한 편이라는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화자가 고답적인 샤먼의 이야기를 끌어내기보다 캐주얼한 방식으로 가족사를 끌어내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김동리의 소설들이 무속을 주제 삼은 것이라면, 김개영의 소설은 사실 어머니의 사랑을 주제 삼은 것이다. 개인사를 표방하며 무속의 친연성을 증언한 점이 K-샤머니즘의 행로에 어떤 쓰임새일지 기대된다. 소설이든 영화든 무속 담론의 새 국면 속에서 이 전개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겠다.
남도인문학팁
어머니와 화자, 샤먼과 시인의 관계
“떡잎 밑에서 살고 싶습니다. 아아 떡잎 밑에서 살고 싶습니다. 고통 속에서 움터 하늘빛에 잠기우는 떡잎. 생살 돋아나듯 솟아오르는 떡잎.” 화자의 꿈은 시인이었다. 무당의 자식이라는 따돌림을 당하면서 꿈꾸었던 세계는 우산처럼 큰 잎이 아니라, 새로 움터 자라는 첫 잎 곧 떡잎이었다. 이를 샤먼과 시인의 운명을 노래한 시였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말장난 같은 입말의 전개를 통해 ‘신(神)’의 자리를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시인을 짧게 발음하면 ‘신’이 된다면서 말이다. 결국 시인과 샤먼은 이름만 다른 한 존재였음을 고백하는 지점에 이른다. 화자는 무당 어머니와 시인인 화자의 교감을 샤먼의 심성에 기대 풀이한 것에서 나아가 사실은 어머니가 시인 중의 시인이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공간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감성이라든지 자아와 타아 예컨대 신과 나를 분리하지 않은 감성의 존재 말이다. 어머니와 화자와의 관계 갱신을 암시하는, 고등학교 때 습작했다는 시 ‘떡잎’이 유의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동리의 무속 서사로부터 한 자락의 계보를 잇고 있지만, 개인사 혹은 가족사라는 무속 담론의 새로운 시선을 끌어낸 점이 돋보인다. 거듭 생각하는 것은, 무당의 자식이라는 어린 시절의 폄하나 무속에 대한 몰이해의 지경에서 K-샤머니즘의 시대라고 하는 새로운 환경으로 훌쩍 건너가는 길목에 이 소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커밍아웃 같은 자전적인 순수소설이 이 시대의 무속 담론에 끼칠 영향이 크다. 디지털 운세와 무속을 커피 한잔 마시듯 자연스럽게 소비하는 시대를 더불어 여는 어떤 마중물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김개영이 어머니를 위해 다시 오구굿을 벌인다면 그것은 아마도 시문학이 어우러지는 캐주얼한 콘서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