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 교수의 필름 에세이>세상에서 ‘가장 낮은 계층’에게 보내는 연민 어린 시선
션 베이커 감독 ‘아노라’
2025년 03월 17일(월) 15:21
션 베이커 감독 ‘아노라’.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션 베이커 감독 ‘아노라’.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션 베이커 감독이 지난 3월 2일에 있었던 아카데미상의 주역이 되었다. 그의 여덟번째 장편영화 ‘아노라’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편집상에 이르기까지 5개 부문을 수상해서다. 그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그리고 4개 부문의 상을 받기도 했다. 그럴 만했던 것이, 그 동안 션 베이커 감독이 쌓아온 영화인으로서의 이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다. 그가 영화판에서 안 해본 일을 찾기 어려울만큼 각본가, 편집자, 촬영감독 그리고 독립영화 감독 외에도 제작자에 이르기까지 그의 직업은 영화 전반을 망라한다.

필자가 2007년에 쓴 논문에서 방송작가와 PD 간의 관계는 소울 메이트 만큼 ‘균형있는 내적 상호작용이 높아야 한다’는 결론을 제기한 바 있다. 그 이후에 시나리오를 감독이 직접 쓰는 작품들이 늘기 시작하면서 작품의 질적 충실도가 높아갔다고 본다. 그런데 이제는 놀랍게도 션 베이커 감독처럼 만능 영화인이 등장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기대를 갖게 하는 이러저러한 이유들이 많아서 설렘을 안고 영화관에 입장했다. 아노라(배우 마이키 매디슨)는 뉴욕의 스트리퍼다. 애칭으로 ‘애니’라 불린다. 이민자인 그녀는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거침없이, 거리낌없이 자신의 몸을 소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러시아 재벌 2세 이반(배우 마크 아이델슈테인)을 자신의 일터인 클럽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의 저택을 방문, 일주일간 섹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1만 5000달러(약 2200만 원)를 받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고 인생 최대의 행복을 누리지만, 일주일 후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그것을 좇아가고 있는 러시아 자본주의는 절대로 아노라가 추구하는 신데렐라의 꿈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유리구두까지 박살내버린다.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성 노동자의 실상을 세세하게 보여주는데, 이 부분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은 감독이 전작에서 보여준 바처럼 하층민과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기존의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을 중심으로 한 도입 파트는 신데렐라의 꿈으로 화려하게 전개된다. 성과 마약, 게임 등 일탈이 일상인 이반과 신분상승을 성취한 듯 만족스러운 애니의 결혼에는 왠지 그들만의 공감영역이 있어 보인다. 이반이 결혼으로 미국인이 되었다며 부모로부터의 벗어남을 환호하는 신이 덧붙어서다. 두 번째 파트는 이반의 결혼 소식을 “가문의 망신”이라며 대노한 이반 부모의 명령에 따라 3인의 하수인이 이반을 찾아 나서는 로드 무비 형식이다. 신데렐라의 꿈을 비틀어놓는 3인방의 등장은 거의 블랙코미디 급으로 전개된다. 3인 중 우두머리인 토로스(배우 카렌 카라굴리안)의 직업이 성직자인 것부터 블랙코미디. 이때까지 애니는 남편을 믿고 의지할 참이라 이들 하수인들을 적대시한다. 세 번째 파트는 이반의 부모가 등장하면서부터다. 부모 앞에서 “여자애랑 한두 주 논 것이 무에 잘못이냐”며 소리 지르는 이반의 본모습이며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로의 이동과 결혼취소(이혼)를 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재벌 패밀리의 민낯이다. 마치 우리나라 드라마처럼, 애니가 변호사를 사서 대응하겠다고 하자 이반 모친이 “그렇게 하면 결국 넌 아무것도 얻지를 못하게 돼”라는 재벌의 힘 과시용 으름장을 놓는다.

세 파트 외에 한 파트를 추가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 파트는 세 수하인 중 애니 감시 담당 이고르(배우 유리 보리소프)와 함께 하는 여정이다. 라스베이거스 행은 전용기로 출발했지만 돌아오는 뉴욕행은 국내선 이코노믹석이다. 불편하게 잠든 애니를 이고르는 자켓으로 덮어준다. 저택으로 돌아와 짐을 챙겨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하루를 같이 보내게 된 애니와 이고르. 이고르는 애니보다 아노라라는 이름이 더 좋다 말한다. 아노라는 ‘빛’을 의미한다며. 눈이 펑펑 쏟아지는 차창, 애니는 신혼여행을 디즈니랜드에서 보내고 신데렐라가 될 수 있는 미국여자 애니가 아니라 하층 계급의 이민자 아노라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그만 이고르의 품에서 펑펑 운다.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은 자본주의의 실상이다.

톨스토이가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자신을 대신해서 콘스탄친 레빈을 등장 인물로 장치하고 메시지를 대변하게 했듯이, 영화 ‘아노라’에서 이고르가 애니에게 보내는 시선은 곧 감독의 시선이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계층에게 보내는 연민 어린 시선. 백제예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