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후원(後園)·임효경>설날 풍경
임효경 완도중 前 교장
2025년 02월 11일(화) 17:00 |
![]() 임효경 완도중 前 교장. |
나에게는 설날 할머니 할아버지 기억이 없다. 대신 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그리고 사촌 오빠들과 언니가 살던 장성 남면으로 설날에 세배를 드리러 가곤 했다. 삼태리 마을 입구에 돌담으로 둘러싸인 초가집 삼간에 사셨던 작은할아버지와 할머니댁에 먼저 들러 인사를 드렸다. 수염을 기르시고 한복 조끼와 고쟁이를 입고 아랫목에 앉아 계시던 작은할아버지는 묵직하신 분이어서, 어떤 말씀을 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단지 긴 머리를 곱게 쪽진 작은할머니에게 눈짓을 하면, 할머니께서 설강 위에 혹은 부엌에서 무언가를 은밀하게 우리에게 내어 주시곤 했다. 곶감이기도 했고, 이웃 젊은 친척이 집에서 만들어 보내온 것을 안 드시고 아껴두신 것이 분명한, 하얀 튀밥이 붙어 있는 노란 누룽지 색깔의 산자 몇 장이기도 했다.
그 시절 설날은 어찌나 추웠는지 모른다. 그래도 큰집은 반듯하게 기와를 얹은 황토집이었고, 부지런한 큰 올케 덕에 아랫목은 장판이 진한 고동색으로 눌어붙을 정도로 뜨거웠다. 큰 가마솥을 얹어 놓은 아궁이에 장작이나 짚을 태워 밥하고 국 끓이면 그 열로 온돌방은 한 저녁을 버텨냈다. 광주 시누이 왔다고 반가워하시며 낮에도 더 군불을 넣어 주셨다. 사촌 언니랑 옹기종기 이불 밑에서 만화책 보며 방안 한 가운데 놓인 화롯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었다. 설날 아침에 엄마가 사주신 새 옷 입고, 동네 친척 어른들 집으로 돌아다니며 세배하고 한 상 받아먹는 재미가 있었다. 광주에서 왔다고, 모두들 칭찬하시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결혼을 하고, 시부모님 모시고 설날을 보냈다. 후덕한 분이셨지만 시어머니는 시어머니고, 무던한 나도 며느리는 며느리라. 설날은 좀 고단했다. 모인 많은 식구들 먹을 음식 장만하고 설거지하고 나면, 그다음 식사 준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랑 나누는 대화도 음식에 국한됐다. 무엇을 준비해라. 무엇을 사 와서 무엇을 만들어라. 무엇이 먹고 싶다. 너는 무엇을 잘하더라. 어머니 이제 무엇을 차릴까요. 무엇이 드시고 싶으신가요?
그래도 세 며느리가 모이고, 아들 셋이 모여서 윷놀이도 하고, 노래방도 가서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 세 며느리는 한마음이 되어 어머니 흉도 잠깐 보곤 했다. 아랫목에 앉으셔서 이것저것 시키기만 하시는 어머니가 위대해 보였고, 나중에 우리도 그렇게 시어머니가 될 줄 알았다. 부모님 휘하 3남 3녀가 모두 둘만 낳아 잘 키우자 세대로서 충실해 각 가정에 두 아이씩 낳았고, 혹은 셋도 됐다. 그 식구가 다 모이면 한 부대는 됐다. 그 부대가 한 자리에 모여 하는 우리 가족만의 설날 행사가 있었다.
설날 아침에 세배도 하고 떡국도 먹고, 한 살 더 먹었으니, 3대(代)가 모두 모여 새해 계획은 무엇인지 발표하는 것이다. 각자 작지만 정성을 담은 선물 하나씩 가져와 제비뽑기를 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하면 백화점 상품권이나 현금을 내놓았다. 아버님이 제일 먼저 제비를 뽑고 선물을 가지신 후 말씀을 하시고, 다음 화자를 지목한다. 그 화자가 또 제비를 뽑아 선물을 가지고, 새해 계획을 말한다. 사회는 손자 손녀가 보도록 했다. 학교를 다니는 손자 손녀들의 새해 계획을 듣고, 우리 모두는 그렇게 되기를 기원해 주었다. 아버님은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아가겠다고 발표하셨고, 95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이렇게 설날을 기억한다. 어릴 적에는 친척들의 따뜻한 환대를 맛보았다. 형편이 좋아졌을 때는 두둑한 세뱃돈의 질감을 사랑의 크기로 여기며 만족했다. 내 살림을 차렸을 때는 내 아이들의 세뱃돈 호주머니를 채워줄 수 있도록 아침의 고단한 기상을 마다하지 않았다. 학교 다니는 아들들이 속을 썩여도, 설날이면 꼭 만났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가르침이 있으니, 일가친척들의 염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으로 버텼다. 다음 세대가 이어갈 시대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가족의 크기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핵가족에서 핵사람의 시대다. 연애도 선택, 결혼도 선택인 시대다. 설날에 가족이 모이는 것도 선택의 시대다.
나는 앞으로도 나의 손녀와 꼭 설날에 만나고 싶다. 또 우리 가족의 크기가 더 커지기를 바란다. 세배하면서 서로의 안녕을 묻고, 한 해의 계획을 들으며, 서로를 위해 기원해 주는 그런 시대에 머물길 바란다. 아니, 이번 설날처럼 하룻밤 같이 자고, 한 공간에서 눈이 펑펑 내려 온통 하얀 설날 아침 풍경을 같이 바라보고, 눈빛으로 놀라움과 반가움을 서로 나누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