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의 큐레이터 노트 60>찬란한 고통, 아름다운 창작
●이선 이강하미술관 학예실장
2025년 01월 19일(일) 17:38
천경자 작 ‘생태(生態)’. 이선 제공
2025년, 을사년(乙巳年)이 시작됐다. 과거 육십갑자 순환 속에서 을사년은 유독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던 해로 기록돼 푸른색의 ‘을(乙)’과 뱀을 뜻하는 ‘사(巳)’가 만나 ‘푸른 뱀(靑蛇 청사)의 해’라 불린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변혁과 치유, 위험을 동시에 상징하는 복합적인 존재로 여겨져 왔다. 우리 역사에서는 주로 지혜와 생명력을 상징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사적으로 이집트의 경우, 뱀은 우라에우스(뱀 모양 왕관)처럼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현재 사용되는 서양의학의 상징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Rod of Asclepius)에도 ‘뱀’이 주요한 모티브인 것으로 보아, 서양에서는 치유와 재생의 의미를 내포해 왔다고 한다.

‘푸른 뱀의 해’에 첫 번째 칼럼의 작품으로 천경자의 1951년 작 ‘생태(生態)’를 떠올리게 됐다. 천 작가는 “뱀을 작품으로 그린 동기는 오직 인생에 대한 저항을 위해서였다”고 했다. 이 징그러운 존재를 한 마리, 한 마리 직시하며 그려 낸 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맞서 이를 극복하려는 저항이었다.

‘생태’는 20대의 젊은 여성 화가인 그가 세상을 정면 돌파하는 용기와 힘을 가졌음을 그림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천경자의 작가적 기질을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다. 당시 그림은 산수나 인물 위주인 한국화 화단에 ‘뱀’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선보이며 충격을 줬다. 더구나 “(그 당시)여자가 뱀을 그렸다”는 화제성으로 인해 많은 관객이 모여들어 마감 시간이 되어도 전시장 문을 닫기 어려울 정도였다. 뱀의 생생한 움직임을 그리기 위해 동네시장의 뱀 장수를 찾아가 한동안 뱀을 관찰하고 여러 장의 스케치를 통해 그려나갔다고 한다. 각기 다른 색깔과 무늬를 지닌 뱀들이 구불거리며 뒤엉켜 있는 모습은 생명이 지닌 강인한 힘과 능력을 보여주고 있고, 작품은 허구를 그린 것이 아닌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지만,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실존 이상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작업을 하던 시기 자신 동생의 죽음 이후, 작가는 온통 죽음에 대한 생각뿐이었고, 자신의 죽은 모습을 그리고 싶어 백골을 어렵게 구해 이후 작품 ‘내가 죽은 뒤’를 남기기도 했다.

“당시 제 누이동생도 죽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의학을 공부 못해 오만가지 저주를 받은 것이고, 두 사람을 저 세상으로 보낸 나는 악이 받쳤던가, 꽃향기 찾아 스치는 뱀 두 마리로는 마음이 차지 않아 수십 마리의 무더기 뱀을 그림으로써 살 용기와 길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다.”(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2006년)

전설이 된 화가이자 ‘꽃과 여인의 화가’, ‘화려한 슬픔의 여인’, ‘찬란한 전설’ 등의 수식어가 증명하는 고흥 출신의 화가, 천경자(1924~2015)를 소개한다. 그를 상징하는 수식어들은 연구적 영역을 넘어 생전 숙명처럼 담아냈던 작업의 정서이며, 그만의 작품세계를 압축적으로 드러낸 핵심 키워드들이기도 하다. 어쩌면 화가 천경자에 관한 연구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대중적 인지도를 생각할 때, 지속적인 작가 연구가 깊이 축적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천경자의 신비주의적이고 사랑과 이혼, 육아의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여성이자 예술가의 여정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짐작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천경자 작 ‘꽃과 병사와 포성’. 이선 제공
1972년 작품 ‘꽃과 여인,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풍경’ 속에서 생명력을 그려냈던 작가는 전쟁의 포탄 속에서도 피어나는 꽃들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보여준다. 1972년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 정부는 천경자, 김기창, 박서보 등 화가 10명을 베트남 전선으로 20일간 보내 한국군의 활약을 그림으로 기록하게 한다. 10명의 ‘종군화가’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었던 천경자는 전쟁터의 참혹함 대신 우거진 밀림, 열대 꽃의 아름다움을 그려냈다. 284×185㎝ 규모의 대작 ‘꽃과 병사와 포성’에는 병사와 탱크들 사이로 꽃이 뿜어낸 듯한 붉은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고통스럽고 참혹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예술을 통해 환상과 아름다움을 표현했던 그의 시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은 그동안 전쟁기념관 수장고에 있었고,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에서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됐다. 천경자와 함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민주화 등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여성 한국화가 23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엮은 전시로 천경자 탄생 100주년이자 개인 회고전 대신 여성 화가들과 함께하는 기획전으로 전시가 꾸려져 화제가 됐다. 천경자가 생전에 서울시에 기증한 93점의 작품 등 100여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회고전을 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선보이는 특별한 전시회였다.

천경자 작 ‘사군도’. 이선 제공
천경자 작 ‘내가 죽은 뒤’. 이선 제공
이후 故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맞아 고향인 고흥에서 특별전이 지난달 31일까지 고흥분청문화박물관과 고흥아트센터에서 개최됐다. 생전 천 화백은 자기를 아끼고 초연히 살고자 해도 인생살이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하늘의 별을 쳐다본다고 술회하곤 했다.

“옛날에 맺히게 가슴이 아플 때면 밤을 기다려 별을 쳐다보면 세례를 받는 기분이었다. 저 반짝이는 별 속에 인자하고 선한 영혼이 있어, 보이지 않는 모습이지만 초음속으로 가깝게 다가와 고민을 씻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 별이라도 믿어야 살 것 같다.”(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p.418~9, 2006년)

천 화백은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한국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화풍과 양식으로 후대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작가는 활동 초기부터 ‘자유로운 창작과 개성’을 중요하게 여겼고 자신의 작품 형식을 동양화, 한국화라는 장르의 틀에 가두지 않았다. 채색화는 곧 일본화라는 당시의 분위기와 편견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자신만의 감수성과 감각을 믿으며 유년기의 기억, 음악, 문학, 영화에서 받은 영감, 연인과의 사랑과 고통, 그리고 모정을 개성적인 화법으로 그린 진정한 모더니스트였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전해주고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찬란한 고통의 삶과 복잡했던 감정들을 예술 작업으로 투영하고 새롭게 구성해 전달함으로써 또 다른 삶을 영위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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