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2024, 광주가 온다
김선욱 서울취재본부 부국장
2024년 12월 16일(월) 18:52 |
김선욱 서울취재본부 부국장 |
80년 5월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환청 처럼 들린다. 계엄군의 군홧발 소리, 귀를 찢는 총 소리, 그리고 절규하듯 떨리는 여성의 목소리(가두방송).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집 근처 방송국 건물이 화재로 불탔다. 대학생이던 삼촌은 우리 집 지하에서 숨어 지냈다. 끔찍한 일도 있었지만, 떠올리고 싶지 않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 진압봉과 구타, 연행. 그들의 총과 칼을 맞고 쓰러진 시민군들. 상무관에 안치된 수많은 주검들. 80년 광주는 ‘신군부’에 의해 철저하게 고립된 채로 참혹하고 처참했다. 언로가 막혀 폭동과 사태로 왜곡됐다.
2024년 12월 3일 22시 30분, 대한민국 헌법이 유린당하고 민주주의의 심장이 멈춘 시간. 국회 앞에서 ‘계엄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가 밤하늘에 힘차게 울려 퍼졌다. 1987년 6월항쟁에서 외쳤던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다시 듣게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80년 광주가 그랬듯이,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국회로 모여 들었다. 누구도 이들을 부르지 않았다. 깊은 밤이었다. 맨몸으로 장갑차 앞을 가로 막았다. 맨손으로 무장한 군인들의 진군을 저지했다. 국민의 힘으로, 한층 성숙된 시민 의식으로 계엄을 진압했다. 그 길목에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탄핵집회는 5월 ‘대동세상’과 꼭 닮았다. 80년 5월, 광주는 주먹밥을 나눠 먹으며 군부 독재에 저항했다. ‘오월 공동체 정신’은 44년 후 ‘릴레이 선결제’라는 이름으로 진화했다. 집회에 참여 못한 이들은 여의도 인근 식당에 어묵·김밥·커피 등을 미리 결제해 참여 시민들의 배고픔을 채워줬다. 핫팩과 음료도 무료 제공됐다. 나눔과 연대의 물결이 타락한 정권을 탄핵으로 심판했다. 한 소녀는 “역사책 속에 들어간 것 같다”고 기뻐했다. 세계 시민이 극찬한 놀라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이다.
광주와 달랐던 한 장면은 지금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제복 입은’ 시민이다. 그날 영문도 모른채 동원된 우리 젊은 군 장병과 경찰들이다. ‘내란’ 이란 멍에 앞에 이들이 느끼고 있을 정신적 충격은 얼마나 클까. 한강 작가는 그들을 이런 말로 달랬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판단하려고 애쓰고, 충돌 속에서도 최대한 소극적으로 행동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명령을 내린 사람들에게는 소극적으로 보였겠지만, 보편적 가치를 기준으로 보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머뭇거림과 주저함, 시민들과 충돌을 피하려는 소극적인 태도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적극적인 몸짓이 아니었을까.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을까?”.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탄핵 표결일인 14일, 한강 작가의 두 질문을 던지며, “그렇다고 답하고 싶다”며 “80년 5월이 2024년 12월을 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5월 광주는 한강 작가의 말처럼 단순한 도시의 이름이 아니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다. 살아있는 민주주의 역사이고, 정신이다. 그래서 ‘5월정신’을 반드시 헌법 전문에 수록해야 한다. 5월 영령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이다.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은 한뿌리다. 앞으로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는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5월 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되는 날, 역사 바로 세우기가 비로소 완성된다고 본다. 2024년 서울과 80년 광주는 민주주의의 피와 땀으로 맞닿아있다. 탄핵집회에서 모두가 지켜봤다. 민주주의를 더 아름답게 꽃피울 새로운 세대가 다음 세상의 문을 열고 있다. 광주가 다시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