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허튼미와 삭힘의 미학: 담화와 남도 음악의 스밈"
421. 삭힘의 미학, 허튼미
2024년 11월 14일(목) 18:07 |
10월 19일부터 20일까지 열린 간장포럼 행사. |
10월 19일부터 20일까지 열린 간장포럼 행사. |
삭힘의 음(音), 삭힘의 색(色)
삭힘의 음악은 어떤 것이고 삭힘의 그림은 어떤 것일까? 서양의 클래식 음악처럼 완벽한 수준의 음악 혹은 오방색이 빈틈없이 조화된 그런 그림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레비-스트로스에게서 찾아낸 것이 반음 혹은 반음계의 음악 관련 언설이다. 날것과 익힌 것으로 세계 신화를 분석하였던 그가 삭힘의 미학, 곧 발효음식을 놓쳤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음악적 측면에서 이 반음을 찾는 일로 대행하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신화학-날것과 익힌 것(한길사, 2005)에 의하면, “브라질 인디언이 무지개에 고통과 죽음을 연계시키는 것처럼 서구인들 역시 ‘반음계(크로마티크)’ 장르는 슬픔과 고뇌를 표현하기에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강화된 반음계가 고조되면 영혼을 할퀸다. 저하되더라도 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비탄의 소리를 듣는다. 반음계(크로마티즘)에 대해 리트레 사전은 루소 논문의 초반부를 인용해 이렇게 첨가했다. 대화에서 ’반음계‘, ’반음계적‘이라는 것은 사랑의 슬픔을 호소하는 듯한, 부드러운, 애처로운 구절을 의미한다.” 이것이 단지 사랑의 슬픔을 호소하거나 애절함의 드러냄 만이 아니라 비로소 신에게 이르는 장치라는 것이다. 마치 전경수가 발효음식을 통해 접신(接神)의 경계를 말했던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나는 이를 남도 시김새의 특성 중 꺾는 음의 반음으로 연결해 해석해왔다. 이를 거듭 반복해 발성하거나 연주하는 구조를 ’거드렁제‘라고 한다. 일종의 프랙탈 풍경이다. 황해로부터 남도에 이르는 황해문화권 혹은 한반도 전반을 관통하는 시김새의 방식이다. 내 논의에 동의한다면 이 프랙탈 음악을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당면한 사회적 상실과 죽음의 손실들을 힐링시킬 음악연구라 할 만하다. 한국음악 중 민속 음악 특히 남도 음악, 더 좁게는 씻김굿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시김새의 템플릿을 주목해야 한다. 지난 칼럼에서 우아미, 숭고미, 비장미, 골계미에 보태어 허튼미를 주장한 남도 미학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그 대목을 다시 가져와 본다. “네 가지의 미의식만으로 남도 문화의 대강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예컨대 갈뚱말뚱 사위의 진도북춤을 어떤 미의식으로 설명할 것인가? 남도인들이 공유하는 미학적 전거 ‘귄’을 어떤 미의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고안한 것이 기우뚱한 균형, 즉 허튼미이다. 남도의 여인네가 등에는 아이 업고 머리에 물동이 이고 양손에 질그릇 하나씩 들고 걷는 인고의 춤사위와도 같은 것, 뒤뚱거리며 걷지만, 물동이의 물 한 방울 튀거나 흘러내리지 않는 것, 이것이 기우뚱한 균형이자 아름다움이고 허튼미다.” 지면상 내 생각을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삭힘의 색깔은 담한 색 곧 담화(淡畫)요, 삭힘의 음은 크로마티즘 즉 반음 혹은 반음계, 꺾는음의 시김새이다. 마치 민화처럼 기우뚱한 균형을 유지하는 그림, 접신(接神)으로 이어지는 음악, 물동이 이고 걷는 춤사위, 이게 바로 삭힘의 미학, 허튼 아름다움이다.
남도인문학팁
담화(淡畫)와 판소리의 서로 스밈
성음(聲音)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득음(得音)을 한마디로 말하면 곰삭은 소리다. 마치 발효의 대명사 김치가 오랫동안 숙성되어 감칠맛을 내는 것과 같다. 약한 온도로 매우 오랫동안 숙성된 발효주라야 낼 수 있는 깊고 그윽한 맛과 같다. 수리성을 대표 사례로 들지만, 암성(暗聲)이나 양성(陽聲)도, 수십 가지의 성음기술과 장단의 교섭도, 궁극적 지향은 늘 그 그윽함과 지극함에 둔다. 마치 된장 고추장의 양장(陽醬) 및 음장(陰醬)과 같다. 이를 심화하여 풀이하면 음양의 철학에 가 닿고 중용의 미학에 이른다. 그늘이 있는 소리, 이면(裏面)이 있는 소리, 한이 든 소리, 익히거나 삭인 정도가 아니라 곰삭은 소리를 지향한다. 오래 기다리고 오래 숙성되어야만 완성되는 소리다. 서양의 벨칸토 창법에 대응하는 판소리 특유의 성음 미학이다. 그래서 판소리를 이면(裏面)의 음악이라 한다. 맑고 고운 소리를 외면하고 끝 간 데 모를 깊이 있는 소리를 미학적 정점으로 삼았던 남도 사람들, 아니 한국 사람들의 감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천이두는 이를 ‘한’과 ‘흥’으로 풀어냈고, 김지하는 ‘흰그늘’이라 했으며, 나는 ‘허튼미(散美)’라 말하고 있다. 산조(散調)가 곧 허튼가락이다. 서로 다른 것을 등가적으로 교섭시켜 ‘장단(長短)’으로 의미화시키고, 노래가 아니라 굳이 소리라 했던 ‘판’이 바로 삭힘(삭임)의 판이다. 지난 칼럼에서 나는 노자의 <도덕경> 22장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해두었다. 멀리 돌았기에 온전하고 굽었기에 곧다. 이제 바꾸어 말한다. 멀리 돌아야 온전하고 굽어야 비로소 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