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후원(後園)·임효경>가을 향기
임효경 완도중 前 교장
2024년 10월 29일(화) 18:34
임효경 완도중 前교장.
드디어 가을이 한창이다. 올 여름은 어찌나 뜨겁고 습하던지, 가을이 오지 않으려나 조바심이 났었다. 마침내 쌀쌀한 바람과 함께 여름은 사라졌다. 잘 가거라~~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낸다. 눈을 뜨자마자 찾는 동네 무등산 산책로엔 구절초도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다. 어여쁜 너 거기 있었구나. 내 눈이 반짝인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도 한바탕 내렸다. 재잘 재잘 풍성하게 물을 흘려보내는 골짜기를 뒤덮은 이름 모를 야생화가 확 눈에 들어온다. 하얗기도 하고 보랏빛도 내며 무성하게도 피어 있다. 저걸 뜯어다 나물 무쳐 먹고 싶네 하는 생각이 들도록 그 이파리의 초록빛이 싱싱하고 유혹적이다. 가을 하천은 토종 피라미들을 키우고 있다. 살이 통통하다. 그리고 어김없이 하얀 털빛의 배가 홀쭉한 왜가리가 나타난다. 그는 배가 고프다. 아침 먹을거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자연의 약육강식 순리 앞에 나도 그냥 무심한 눈초리로 피라미들에게 삼가 위로를 건넬 뿐이다.

앞서 가던 남편이 소리쳐 외친다, 어~~!!! 향기로운 냄새가 어디서 나지? 오호라, 무지개 동산 한 쪽 구석에 그리 크지 않은 금목서가 황금빛 꽃을 무더기로 피어 올렸다. 천리도 간다는 그 향기가 가을 아침 바람에 실려 무심한 남자 코의 감각을 간지럽힌 것이다. 금목서라는 이름을 마음에 새기느라, 그는 ’금목서 금목서‘ 계속 읊조린다. 그러고 보니, 이 가을이 떠나가기 전에 가을을 닮은 그녀를 만나봐야겠다. 금목서가 유난히 우아한 자태와 멋진 향기를 뽐내는 나주의 한옥 까페에서.

10여 년 전, 나주고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교감 자격을 갖추기 위해 내가 선택하고 손들고 자진하여 들어간 학교였기에 학교의 중책을 도맡아 해야 했다. 기숙사 사감과 교무부장 업무를 하고 전남 단위 공개수업을 하였다. 또 무지막지하게 밀어 붙이는 학교 관리자들과 마음이 맞지 않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야 하는 때였다. 몸은 말라가고, 마음은 까맣게 녹이 슬었다. 그 험한 길 그냥 포기할 까 싶었다. 그런데, 같은 교무실 공간에 마음에 합한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가 없었으면, 나는 딱딱하고 메마른 학교의 문화 속에서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권위만 내세우는 사람으로 치달았을지 모른다.

나이는 어리지만 삶의 태도가 단단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큰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나무랄 것도 없이 누구나 쉽고 편한 업무를 맡고자 하는 학교생활 와중에 그녀는 참 신선한 충격이었다. 늘 좋은 수업을 고민하고, 자신이 맡은 학생들의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교과지도나 생활지도 그 어느 것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참 독특하고 귀한 후배 선생님이었다. 정이 많았지만, 판단할 때는 그 누구보다 공정하고 의로운 선택을 했다. 고민하면서도 결국 스스로 힘든 길로 나서는 그녀를 보면 떠오르는 미덕이 있었다. 바로 외유내강. 그녀는 그저 평교사의 길을 한 걸음씩 단단하게 걸어가면서, 나를 암묵적으로 응원해 주었다. 힘내세요, 선생님.

나는 그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바쁘고 힘들 때, 한 잔의 커피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여유를 배웠다. 그녀는 그 당시 흔하지 않았고, 따기도 힘든 바리스타 자격증 소유자였다. 아침마다 신선한 커피를 수동으로 갈고 정성스럽게 내려 주는 커피는 나에게 또 한 번의 충격이었다. 이 바쁜 와중에 커피를 내려 마신다고? 그런데, 급하게 시작한 하루 초입에 하루 종일 보낼 교무실의 공간을 채우는 그 쌉쌀한 커피 향기는 달콤할 뿐 아니라, 위로와 힘이 되었다. 담담한 미소를 짓게 했고 더불어 담담한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 인생 뭐 있어? 커피 한 잔 이렇게 마실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순수하기 그지없는 미소로 내 곁에 있어주는 그녀가 있으니, 더 참고 견뎌도 되지 않은가? 단지, 나는 그녀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나의 길을 바르고 정(靜)하게 걸어가도록 애쓰면 되지 않겠는가?

그녀는 나에게 금목서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기게 해 주었다. 그녀와 함께 한 어느 가을날은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이다. 햇살이 청량하고 따뜻하니, 멀리 한수제의 수면은 햇살을 반영하여 반짝이고 있을 날이었다. 방과 후 눈이 마주 친 우리는 그 날씨를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학교 밖으로 나섰다. 가을날 오후, 한수제 둘레 길은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그리고 들른 나주향교 옆 한옥 까페 넓은 마당에는 향기가 가득했다. 금목서였다.

나도 커피 향기를 내고 싶었다. 바리스타 자격을 가진 그녀를 사모하던 나는 후에 기회가 되어서 바리스타에 도전하였다. 마지막 학교에서 바리스타 자격있는 교장 커피숍-효경 까페-을 열었다. 아침마다 교장실 문을 열어두고 커피를 갈아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리며 향기를 날려 보냈다, 그녀를 빙의한 것이다. 오며 가며 함께 마신 커피 향기가 선생님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기를 바랐는데, 과연 그랬을까?

이 나이 되어서도, 나는 아직 받는 것에 더 익숙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커피 향기와 금목서의 향기가 되었을까? 아무런 대가없이 이 쌀쌀한 가을 아침 이슬 속에서 무심하게 피어 그 어떤 것과 비교되지 않은 나름대로의 색으로 반짝이는 풀꽃들만큼의 위로가 되었을까? 그냥 내어 주면서 아름다운 향기로 주변 사람에게 위로와 힘을 주었던, 손해 보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 되는 세상을 보여 주었던 그녀가 그리운 날, 가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