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 교수의 필름 에세이>디지털 시대, 더 고독해지는 ‘그녀’와의 세계
2024년 10월 21일(월) 16:43 |
스파이크 존즈 감독 ‘그녀 (her)’.㈜더쿱 제공 |
스파이크 존스 감독 ‘그녀 (her)’ 포스터.㈜더쿱 제공 |
테오도르(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편지를 대필해주는 작가다. 다른 이들의 절절한 사랑을 대신 표현해주는 그는 아내와 별거중이다. 편지의 구절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나면 정작 본인의 마음은 더욱 헛헛하고 외롭다. 지나치기 어려운 신제품 프로모션 문구가 공허한 그의 눈길을 붙잡는다. 대화가 필요했던 그에게 적절한 상품 OS 1. 젊은 여성의 목소리(배우 스칼렛 요한슨)가 귀를 타고 들어온다. 이른바 컴퓨터와의 교제가 시작된 것이다. 허스키하고 섹시한 목소리가 다정하고도 친절하게 그리고 재미나게 대화를 진전시켜간다. 언제 어디에서든 부르면 응답하고 내가 아는 지식의 범주에서 대화를 할라치면 0.02초 만에 순간독서를 마치고 대응하는 AI 그녀. 테오도르는 이제 외롭지 않다. 그녀는 때로 테오도르를 호출하고 사랑을 고백하는가 하면 목소리만으로 남성성을 흥분시킨다. 그런데 그녀는 테오도르만의 그녀가 아니다. 수만 명의 고객을 대상으로 분화되어 있다. 테오도르가 이를 인지하고 자각한 순간, 그에게는 더 큰 공허로움이 엄습한다.
줄거리는 우리 사회의 일면을 보여준다. 우리의 눈에 자연스레 스치는 풍정은 휴대폰을 장착한 사람들이다. 길거리에서 부딪치는 군중들은 모두 휴대폰으로 무장되어 있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대화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활보하는 사람들. 버스나 지하철에 착석할라치면 어김없이 카톡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DMB나 게임, 모바일 독서에 열중한다. 여기에서 한 발만 나아가면 실제인물이 아닌 OS(운영체제)와의 데이트를 실시간 즐길 수 있다. 이 사실에 대해 하등의 이상할 것도 신기할 것도 없다. 이른바 혼자서 무엇이든 하는 문화가 AI를 중심으로 서서히 번져가고 있으므로.
그런데 이 변화가 우리의 문화에 얼마나 많은 파급을 불러오는지, 가장 깊숙한 문화적 본성까지 자극하는지를 가끔은 짚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뿌리가 흔들리는 진동을 감지해야만 한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감독은 현대인에게 익숙한 문화를 한번 되짚어보기로 한 것 같다.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문화’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는 ‘(컴퓨터와 함께하는) 나 홀로 문화’로의 전이. 외적 진화 속에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침잠해 들어가고만 있는 내적인 고독을 수면 위로 부상시켰다.
우리는 오랜 세월 농경문화를 전승해온 민족이다. 농경문화가 사회적으로 유전되어 온 만큼 우리에게는 이 사회적 DNA가 깊숙이 침착돼 있다. 우리의 농경문화 본성은 ‘We-ism’이다. 두레, 품앗이로써 노동력을 나누면서 인심도 나눠왔다.(‘금 모으기 운동’이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우리에게는 흔연스러웠듯)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문화가 발달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웃집 살림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알고자 하는 오지랖 넓은 캐릭터도 흔하다. 반면, 서구사회에는 ‘I-ism’이 발달되어왔다. 양치는 목동은 늘 혼자다. 혼자서 판단하여 양을 몰다가 양이 풀을 뜯는 동안에는 혼자서 풀피리를 불며 논다. 이러한 환경은 개인주의를 파생하였다. 개인주의를 침범하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무례한 문화적 특성이다.
서구문화로 희석된 오늘의 우리에게는 때로 내재된 ‘We-ism’보다 새롭게 수용된‘I-ism’의 성격이 더 강해 보이곤 한다. 특히, 모바일로 대변되는 디지털 미디어 환경 속에서 점차 이 정체성을 희석시켜가고 있다. 이웃 간의 교류가 사이버 세계에서 익명으로 이동하고 프라이버시를 중요한 단어로 내세우는 현대인. 그래도 사회적 유전인자 ‘We-ism’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맥 중심 학연·지연·혈연사회를 여전히 고수한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 담긴 고독이 우리의 정서에는 더욱 처절해 보인다. 영화 ‘그녀’를 통해 인간이 갖는 고독의 의미 외에도 인간성, 나아가 인간의 정체성이 자꾸만 진전해가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억눌리는 것은 아닌지, 객체(her)에 휘둘리는 주체(I)의 무력한 공허를 한번 되돌아본다. 백제예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