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고경명 그리고 광주
노병하 취재1부 정치부장
2024년 09월 23일(월) 18:06
제봉 고경명 선생은 임진왜란때 왜병을 맞아 목숨을 걸고 장렬하게 싸우고 산화한 호남의 장수이자 의병이다. 그는 호남의병의 상징이기도 하다. 장흥 고씨 집안에서 태어나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벼슬길에 오른다.

그러던 중 1593년 왜란이 터졌다. 불과 이틀 만에 부산성, 동래성이 무너졌다. 당시 왕이었던 선조는 부랴부랴 가마를 타고 파주를 지나 평양성으로 몽진했다. 이때 벼슬길에서 물러났던 노년의 고경명은 의병 6700명을 모집한다. 왕을 구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창평에서 출발해 서울로 진격하다가 일본군 6군 고바야카와 타다가케가 금산으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말머리를 돌린다.

허나 일본군은 이미 금산성을 점령하고 조선군을 맞이할 채비를 끝낸 상태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조방장 곽영과 합세해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했으나 별동대가 출발하자마자 지원키로 한 곽영이 전투를 꺼렸다. 그 틈을 타 일본군은 별동대 900명을 포위 전멸시켰다. 이를 금산1차전투라 한다. 이 전투에서 고경명과 그의 둘째 아들 고인후, 의병장 안영 유팽로가 전사한다. 허나 고경명과 같이 떠났던 호남의병은 와해되지 않았다. 그들은 금산에 이어 진주성에서 왜군들과 맞섰다. 여기에는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전멸했다.

예로부터 호남에서는 살아서는 절대로 자신이 의병이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죽은 동지들에게 미안해서였단다. 죽어서야만 의병이 될수 있었다.

이 가슴 아프고도 웅혼한 이야기가 광주 남구의 한 공무원의 노력으로 인해 연극으로 만들어진다.

불과 3000만원의 초저예산이지만 참여하는 이들은 모두 전문배우다. 호남의병의 삶을 재현해내고자 재능기부에 가까운 참여를 했다. 심지어 감독은 서울 대학로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최치언씨다.(그 역시 광주 남구의 설득으로 참여했다)

고경명의 후손들이 사는 진주에서는 소식을 듣자 마자 문중에서 남구 공무원에게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연극이 열리는 당일에는 버스를 대절해 방문키로 했다. 여기에는 진주지역 주요 인사들도 참석한다.

광주시는 어떨까. 고작 구에서 열리는 3000만원의 연극이라 알기는 할까 싶다만 호남의병의 처절한 노래가 울리는 자리다 보니, 시의 높은 분이 참석 해보길 바라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일까. 돌아오는 주말에는 포충사에 가볼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