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러시아인들 크림반도 합병 ‘러시아의 봄’으로 기억
<55>크림반도 합병 10년과 러시아의 봄

크림반도 우크라이나에 선물 준 흐루쇼프의 결정에
당시 대다수 시민들 소련 내 존재하여 중요하지 않게 생각
러시아의 봄 영웅… 조국 믿음 이어오다 목숨 잃은 사람들
크림반도 합병, 전체 러시아 국민의 가장 강력한 통합 상징
2024년 08월 29일(목) 16:32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대선 승리와 크림반도 합병 10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려 이 자리에 참석한 푸틴 대통령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오고 있다.AP/뉴시스
2024년 3월 18일은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합병된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러시아인들은 크림반도 합병을 서로 축하하면서 그날을 ‘러시아의 봄’으로 기억하고 있다. 러시아의 봄은 그 당시 크림반도, 도네츠크, 루간스크, 니콜라예프, 오데사 등 우크라이나 여러 도시에서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러시아 민족의 자결을 위한 일련의 강력한 역사적 과정을 지칭하고 있다.

2014년 2월 말부터 우크라이나 쿠데타에 반대하는 단체들이 모임을 갖는 경향이 나타났다. 모든 행동은 새로운 우크라이나 당국과 그 지역들의 가장 극심한 반대하에 이루어졌다. 크림반도는 2014년 3월 18일에 러시아에 합병되었고, 2022년 2월 21일 푸틴 대통령은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을 독립 국가로 승인했다.

크림반도 주민들은 2014년 크림반도 반환이 러시아 역사의 새로운 단계의 시작이며, 이것이 올바른 결정이라고 했다.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테러와 탈러시아화 물결이 크림반도를 압도했을 것이고, 이곳은 나토(NATO) 기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러시아인은 크림반도가 항상 자신들의 소유라고 생각했다.

첫째, 러시아와의 합병 10년은 중요한 사건이지만 크림반도의 러시아 소유권과 러시아의 관계는 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림반도에는 타우리안(Taurian) 및 킴메르족의 원주민, 스키타이 유목민, 그리스인, 로마인 및 아르메니아 상인의 정복자, 쿠만스(Cumans) 및 제노바 상인, 투먼-킵차크(Horde tumens),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Janissaries), 그리고 크림 타타르족 등 18세기 중반까지 수백 년 동안 다민족이 혼합되어 거주해 왔다. 또한 모든 시대는 어떤 식으로든 이 지역과 교류했다. 이곳은 고대 문화, 비잔틴 유산, 그리고 기독교 문화가 결합된 문명의 요람이었다.

그 후 1783년 4월 8일 예카테리나 2세는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합병한다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20세기에 러시아 내전이 끝나자 이 영토에는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형성되었고, 이곳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크림반도는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고, 세바스토폴은 250일 동안 방어를 지속했지만, 영토가 부분적으로 점령당하기도 했다. 크림반도는 1944년 5월 12일에야 독일군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1954년 흐루쇼프의 법령에 따라 크림 지역과 세바스토폴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전되었다. 그는 말 그대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선물을 주었다. 최고위원회 상임위원회 법령은 이 결정이 경제의 공통성, 영토적 근접성, 크림 지역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사이의 긴밀한 경제적, 문화적 유대를 고려하여 내려졌다고 명시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당국은 주요 문제인 물 부족을 포함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드네프르강(더 정확하게는 카호우카 저수지)에서 크림반도와 헤르손 지역의 건조한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북부 크림 운하가 건설되기로 결정되었다. 모든 요인을 고려하면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와 동일한 경제 관계에 있다는 점이 주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에 일반적으로 소련 지도자들은 행정 경계 재조정에 대해 매우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흐루쇼프의 결정에 대다수 러시아 시민은 크림반도가 어쨌든 자신들의 땅이고 사라지지 않고 소련 내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결정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으며 당 지도부의 어떤 반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련 붕괴 이후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로 넘어갔다. 1990년 11월 19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10년 동안의 협정을 체결했으며, 서명 당시 두 공화국은 국경을 상호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1991년 2월 국민투표를 통해 크림반도 지역은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1991년 10월 크림반도 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양도하는 행위가 국민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수행되었다는 성명을 채택했다. 그리고 1992년 5월 21일 러시아 연방 최고위원회는 1954년 2월 5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의 결의안은 채택된 순간부터 법적 효력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 이유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과 입법 절차를 위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러시아 의회는 크림반도의 지위 문제가 크림반도 주민의 의지를 고려하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합의 주제라고 간주했다. 1997년 5월 31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우호, 협력 및 파트너십 조약이 키이우에서 서명되었다. 당사자들은 그들 사이의 국경의 불가침성을 확인했다. 1998년 12월 새로운 크림반도 헌법이 발효되었고, 우크라이나 일부였던 크림 자치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등장했다. 이 지역은 2014년 사건까지 이 상태를 유지했다.

둘째, 러시아인들은 크림반도가 러시아의 봄으로 인해 원래 고향인 러시아로 돌아왔다고 보고 있다. 그들의 집으로의 여정은 정치적 변혁으로 어려웠지만, 조국에 대한 믿음으로 공동 가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로스토프에서 곧 기차가 도네츠크, 마리우폴, 베르단스크까지의 철도가 복구되어 세바스토폴까지 직행하게 될 예정이다.

러시아의 봄은 2013년 11월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유럽연합(EU)과의 협정에 서명하지 않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으로 처음에는 키이우에서, 그다음에는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2013년 11월 21일 저녁 대통령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우크라이나인들이 키이우의 독립 광장(마이단)으로 왔다. 시위자들의 요구도 바뀌었다. 주요 목표는 야누코비치의 대통령직 사퇴였다.

하지만 2013년 11월부터 2014년 2월까지 크림반도에서는 인구 대다수와 크림반도의 권력 구조에 있는 사람들의 상당 부분은 분명히 공식 정부에 대한 지지와 마이단의 방법과 열망에 대한 거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2월 21일부터 23일까지 크림 타타르인 협의회(Mejlis)만이 심페로폴에서 합법적으로 선출된 국가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전복시킨 사람들을 지원하는 행동을 조직했다. 2014년 2월 22일 쿠데타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권력이 야당에게 넘어갔고,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국가를 떠나야 했다.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가족과 함께 크림반도로 대피했다. 나중에는 러시아 로스토프나도누로 이동했다. 2014년 2월 키이우에서 크림반도로 돌아오는 주민을 태운 버스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아 차량이 불타고 사람들이 사망했다.

2014년 2월 23-24일에 새로운 친러시아 인사들이 세바스토폴 행정부를 찾았다. 이틀 후 크림 타타르인 협의회 대표는 키이우의 무장 세력과 함께 심페로폴의 크림 의회를 차단하려고 했다. 2월 26일 크림 의회 성벽 근처 심페로폴에서는 새로운 우크라이나 정부 지지자들과 집회에 참석한 친러시아 크림반도 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 폭동으로 2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부상당했다. 최고위원회의 업무가 차단되었다. 2월 27일 의회가 업무를 재개한 후, 의원들은 아나톨리 모길레프 정부를 해임하고 지역 러시아 통합 운동의 지도자인 세르게이 악세노프를 크림 자치공화국의 새 총리로 임명했다. 2014년 2월 27일 공화국 최고위원회는 크림반도 지위에 대한 국민투표 날짜를 같은 해 5월 25일로 정했다. 우크라이나 새 정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3월 1일 세르게이 악세노프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크림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같은 날 러시아 연방 의회는 크림반도에서 러시아 군대의 사용을 러시아 연방 대통령에게 승인한 후(흑해 함대가 위치한 지역의 세바스토폴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협정에 따라 2개의 공군 기지에 최대 25,000명의 러시아 군인이 있었음), 특수 작전 부대 군인과 크림 자기방어 대표들은 우크라이나 군대를 완전히 봉쇄했다.

2014년 3월 6일 크림 최고위원회는 러시아 대통령에게 공화국을 러시아 연방에 포함시켜 줄 것을 호소했다. 3월 16일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에 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며, 크림반도 주민의 96.77%(123만3002명), 세바스토폴 주민의 95.6%(26만2041명)가 러시아 연방 가입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투표율은 각각 83.1%와 89.5%였다. 크림 지역에서는 2.51%(31,997명), 세바스토폴에서는 3.37%(9,250명)가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 일부라는 입장을 밝혔다. 국민투표에는 이스라엘, 이탈리아, 프랑스 등 21개국 출신 50명 이상의 참관인이 감시했다. 2014년에는 약 230만 명이 크림 지역과 세바스토폴에 살았다. 이들은 러시아인 약 150만 명, 우크라이나인(대부분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 35만 명, 크림 타타르인 23만 명 이상이었다.

3월 17일 크림 의회는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3월 18일 크림반도는 러시아 연방에 가입하기로 합의했다. 2014년 3월 18일 푸틴 대통령은 크렘린에서 크림 지역과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통합에 관한 협정에 서명했다. 우크라이나 시민권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우크라이나 주민과 크림반도에 영구 거주하는 무국적자는 러시아 연방 시민으로 인정되었다. 크림 공화국의 공식 언어는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크림 타타르어이다.

우크라이나, 미국 및 기타 NATO 회원국의 강력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크림반도 주민의 의지로 러시아 연방에 합병되는 일이 사실상 이뤄졌다. 크림반도 주민들은 변화를 원했다. 수년간 그들은 단순히 우크라이나 당국에 지쳤다.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권력은 거의 관심이 없었다. 크림 지역과 세바스토폴은 우크라이나의 특정 관심도에서 꼴찌였다. 그러나 이는 단지 사회경제적 이유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크림반도 주민 대부분은 항상 자신들이 러시아 일부라고 느껴왔었다.

그리고 크림반도 합병에서 러시아 정부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크림반도는 우선 국민, 세바스토폴 주민, 크림이다. 그들은 우리의 자랑이며 수십 년 동안 조국에 대한 믿음을 이어왔다. 그들은 결코 러시아와 분열된 적이 없다. 이것이 러시아의 봄 기간 동안 크림이 우리 공동 가족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우리는 러시아의 봄의 영웅들을 항상 기억할 것이다. 2014년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 쿠데타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모국어로 말할 권리와 문화 보존을 위해 목숨을 잃은 모든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합병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합병하는 것은 역사적 필요성과 역사적 정의의 회복뿐만 아니라 남부 국경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국가 안보를 보장하는 중요한 조치 때문에 결정되었다고 지적했다. 크림반도 합병 이후 주민들은 지역 발전과 역할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크림반도의 합병이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고 필요했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세계 시장으로 농산물 등을 수출하려면 물류 항로가 필요했었다. 또한 전략적으로도 크림반도는 18세기부터 이미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오늘날 그 가치가 크게 높아졌다. 그런 점에서 크림반도는 러시아에게 경제적, 문화적 통합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러시아인들은 크림반도의 합병은 전체 러시아 국민의 가장 강력한 통합의 상징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김영술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