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강항 선생의 ‘울림’
이용환 논설실장
2024년 07월 16일(화) 16:39
이용환 논설실장
1995년 8월 어느 날, 무라카미 쓰네오 수은 강항 선생 일본연구회장이 선잠 결에 이상한 꿈을 꿨다. 수십여 년 강항 선생을 연구했지만 단 한번 꿈에서조차 만나보지 못했던 강항 선생이 그에게 뭔가를 건네주는 꿈이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한국인 한 사람이 무라카미를 찾아와 편액 하나를 내밀었다. 1597년부터 1600년까지 3년여 간 일본에서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강항 선생이 1618년까지 영광에 살면서 누군가에게 써준 것이었다. ‘어느 무엇보다 소중한 인연이었다’는 게 무라카미의 회상이다.

편액에 쓰인 글귀는 종오소호(從吾所好). 단 한 번뿐인 인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었던 공자의 마음이 담긴 명구다. 어려서 고생을 많이 했던 공자는 나이 쉰을 앞두고 홀연 깨달음을 얻었다. 부와 권세를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지만, 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는 희망과 도전이다. 임진왜란을 거쳐 정유재란까지 수많은 백성의 고초를 목격했던 강항 선생도 공자의 길을 가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거기에 몰두 하겠다는 선생의 결기가 당당하다.

그러나 편액의 운명은 기구했다. 수백 년 대대로 진주 강씨 한 문중의 사당에 보존됐던 편액은 그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사당이 허물어지면서 1950년 경 사당과 함께 파손됐다. 어쩌면 사라질 뻔한 위기였다. 하지만 편액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결국 무라카미에게 전달됐다. “1995년 8월, 한국의 소유자로부터 편액을 받았고 오즈시의 건설업자에게 부탁해 편액을 수리했다. 조상이 소중히 여기던 것을 손괴해 죄송하고 부끄러우니 이름은 공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게 무라카미 회장의 설명이다.

강항 선생의 친필 편액 ‘종오소호’가 17일 전남도 기념물 28호인 영광 내산서원에 돌아온다. 이낙연 전 총리와 무라카미 회장이 지난 2002년 영광군이 주최한 강항 세미나에서 처음 만난 이후, 20여 년이 넘는 두 사람의 교류가 만든 의미 있는 성과다. 소유자인 무라카미 회장에게 편액을 기증받은 이 전 총리도 이날 기증식에 참석해 강항기념사업회 등과 편액의 보존과 국가지정 문화유산 등록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강항 선생은 생전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겼다 한다. 지도자로서 역할을 외면했다는 선비의 자책이다. 거짓이 횡행하는 정치권과 도덕이 무너진 지도층이 혹세무민하는 지금, 400여 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선생의 울림이 더욱 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