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 교수의 필름 에세이>"사고는 우연이 아니었다" 설계자가 처놓은 덫
이요섭 감독 ‘설계자’
2024년 06월 02일(일) 17:42
영화 ‘설계자’ 포스터. (주)NEW 제공
리메이크 영화 ‘설계자’는 홍콩 영화 소이청(바오루이 정) 감독의 ‘Accident(엑시던트)’(2009)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이 같은 장르인 영화라면, 마땅히 비교가 따른다. 그러니 전작보다 잘 만들어야 등호를 이루지 대부분은 평가절하되기 십상이다. 한국판 ‘엑시던트’라면 한국적 상황을 적절히 대입해서 납득을 끌어내야 하고 원작보다 좀 더 극적이면서 정밀하게 플롯을 구성해야 할 뿐 아니라 예측불허의 결말로써 상식을 이끌어야 간신히 등호를 이룰 것이다. 그런데 영화 ‘설계자’는 예상대로 부등호의 평가를 받고 있는 중이다.

가장 큰 문제는, 감독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모를 만큼 주제가 모호해 보인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우연에는 설계된 의도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주장하고 마는 것처럼 비쳐서이다. 아무리 완벽한 청부살인업자라 해도 의심의 덫에 빠지면 무너지고 마는 인간의 심리를 드러낸 원작과 비교되는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 보였다.

둘째는, 서사구도의 혼잡함이다. 원작이 인물에 포커스를 맞춘 심리 스릴러라면 영화 ‘설계자’는 인물의 심리보다는 사건 중심의 구도로 비친다. 원작이 주인공의 독백에 따라 보고 듣는 시점을 관객의 경험과 같이하는 구도라면, ‘설계자’는 초반에 주인공 영일(배우 강동원)의 독백을 따라가다 팀원들의 대사로써 보충설명을 받다가, 그러다 불쑥 주변인물 유튜버 하우저(배우 이동휘)의 생중계가 이어진다. 그리고 형사 양경진(배우 김신록)의 설명 등등이 뒤섞이다 보니 객석에서는 주인공의 독백에서 벗어나 사건의 흐름을 쫓아가는 혼잡한 구도를 이룬다.

유튜버의 생중계가 갑자기 대로변 뉴스 전광판에 올려지는 것 등은 개연성의 저해요소였다. 유튜버의 등장 자체가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라는 생각이다. 주요 인물로 압축되기보다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다가 죽음에 이르는 사건의 연속. 전반의 단편적 탄탄함에 비해 후반으로 갈수록 사건의 개연성도 설명도 약화되어갔다. 그러다 보니 영일의 편집증적 의심이나 관계의 갈등, 알 수 없는 모호함이 주는 두려움, 고독 등의 심리선을 잘 읽어내기 어려웠다.

사건과 사건의 긴박함을 죽 이어가다 보면 중간에 이완의 단계가 있을 법도 한데 긴박감의 호흡이 끊이질 않고 이어진다. 99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임에도, 롤러 코스터의 정점에 다달으면 얼른 벗어나기를 바라는 심리 마냥 영화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배우들의 표정처럼 너무 어둡고 너무 경직되어 집중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영화 ‘설계자’. (주)NEW 제공
지나치게 많은 것을 설계하려다 길을 잃은 것 같은 영화라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코믹함과 풋풋함의 이미지를 지닌 배우 강동원에게서 어둡고도 주도면밀한 중후함을 갖춘 새로운 면모를 보는 것도 신선했고 트랜스 젠더 월천(배우 이현욱), 사회초년생다운 풋풋한 점만(배우 탕준상), 내심을 드러내지 않는 주성직(배우 김홍파) 등 조연들의 뚜렷한 캐릭터는 그들의 탄탄한 연기력과 아울러 스크린을 채우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검찰총장과 같은 거물급 권력인사와 비자금 그리고 이에 주목하는 언론을 핵심 소재로 내세운 점이다. 친숙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언론환경과 이로 인해 파생되는 여론을 ‘냄비’에 빗대는 일이 빈번한 만큼 언론을 활용하는 것은 한국적 상황에 적절해 보였다. 재키(배우 이미숙)의 “사건은 사건으로 덮는 거니까”라는 대사는 오늘의 뉴스에도 적용되고 있을 법하니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워진 시대상을 반영한 이 영화는 영일의 정신을 지배하는 음모가 사실인지 환상인지는 의문으로 남겨 둔다. 사실이라면, 설계자들 간에도 약육강식이, 설계와 우연 사이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설계자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요섭 감독은 “우리가 뭔가를 알아내려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진실에 도달할 수 없어 무기력과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며 “진실을 찾는 주인공의 혼란과 혼돈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