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통제에 충돌…열사 사진 잘못 사용 ‘빈축’
●제44주년 5·18기념식 이모저모
“그립다” 열사 유족들 묘비 앞 통곡
5·18 유공자까지 입장 막아 ‘분통’
‘5·18 헌법 수록’ 요구 기습시위
“그립다” 열사 유족들 묘비 앞 통곡
5·18 유공자까지 입장 막아 ‘분통’
‘5·18 헌법 수록’ 요구 기습시위
2024년 05월 18일(토) 17:19 |
5·18민주화운동 44주기인 18일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이창현군의 어머니가 이 군의 묘 앞에서 아들의 영정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 나다운 수습기자 |
●44년 지나도 마르지 않는 눈물
18일 제44주년 5·18 기념식이 진행된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는 하루 종일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소복 차림의 유족들은 1980년 ‘그날’처럼 묘소 앞에 엎드려 하염없이 흐느꼈다.
‘오월의 꼬마’로 알려진 사진의 영정 속 인물인 조사천 열사의 부인 정동순씨는 “자녀들이 결혼할 때마다 남편이 가장 그리웠다”며 “다른 것들은 바라지 않는다. 남편이 가족 모두 건강할 수 있게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며 묘비를 쓰다듬었다.
지난 17일 명예졸업장을 받은 5·18 행방불명자 고(故) 이창현군의 어머니 김말임(78)씨도 이른 오전부터 묘지를 찾았다. 이 군의 묘비 앞에는 이미 많은 추모객이 다녀간 듯 꽃다발과 과자가 잔뜩 쌓여있었다.
김씨는 영정을 쓰다듬으며 “네가 졸업장을 받게 됐다. 좋은 사람들이 너를 위해 선물도 사주고 시도 지어 줬다”며 “이제 그만 해야지 하면서도 자꾸 너를 찾는다. 어딘가에 살아있지 않을까, 입양이라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때 너를 찾지 못해 미안하다”며 눈물지었다.
18일 5·18 유공자 김행엽씨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참석 명단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 통제되자 경호원에게 5·18민주유공자증서와 주민등록증을 내밀며 유공자임을 호소했다. 나다운 수습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기념식 참석으로 묘지 입구가 펜스 등으로 통제되자 불만을 터트리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경찰 인력만 기동대 40여개 중대 등 3500여명을 배치되는 등 경비도 삼엄했다. 일부 유공자는 ‘80년 5월 당시를 연상케 하는 펜스를 당장 철거하라’고 소리치며 입구에 설치된 펜스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5·18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한 서상윤(64)씨는 “이렇게 강한 통제가 이뤄진 기념식은 처음이다”며 “원래는 민주의 문 앞까지 들어갈 수 있었는데, 올해는 앞에서부터 철제 울타리를 설치하는 등 과한 통제로 참배객들의 발길을 돌렸다”고 비판했다.
5·18 유공자 김행엽(63)씨는 경호원에 5·18민주유공자증서와 주민등록증을 내밀며 “담당자를 만나러 가는 길까지 죄다 막으면 어떻게 들어가라는 거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유공자 참석 명단을 확인하려 참배 광장 안내 부스로 가려 했는데 경호원이 이를 막아선 것이다. 김씨는 경호원과 실랑이하다 팔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결국 그는 어렵게 신원 확인 절차를 거친 뒤 기념식이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5·18민주화운동 44주기인 18일 오전 9시께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생명의숲되찾기합천군민운동본부가 ‘전두환 공원 거부권 행사’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강주비 기자 |
5·18민주화운동 44주기인 18일 오전 9시께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주최로 국가보훈부 규탄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윤준명 수습기자 |
각 지역에서 모인 시민들은 묘지 앞에서 저마다의 ‘민주화’를 외쳤다.
생명의숲되찾기합천군민운동본부는 묘지 입구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전두환 공원 거부권’을 행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활동가 고동의(54)씨는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에 전두환의 호 일해를 따서 만든 공원이 있다”며 “표지석에는 전두환이 친필로 쓴 본인을 우상화한 내용이 적혀있다. 5·18헌법전문수록 얘기가 흘러나오는 현재 이런 오물을 그대로 두는 건 오월정신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전국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도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현우 민주유공자법제정추진단상황실장은 “오는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민주유공자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달라”며 “민주유공자법은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한를 국가가 모심으로써 다시는 부당한 권력이 판치는 세상을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하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영상에 엉뚱한 열사 사진 쓴 보훈부
기념식에서 상영된 영상에 열사의 사진이 잘못 사용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국가보훈부는 이날 행사에서 학생 희생자인 박금희·류동운 열사을 조명하며 관련 영상을 상영했는데, 박금희 열사 소개 부분에 박현숙 열사의 사진을 내보낸 것이다.
박금희 열사는 5·18 당시 헌혈 운동에 참여한 뒤 집으로 돌아가다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으며, 박현숙 열사는 관을 구하기 위해 주남마을 마이크로버스에 올라탔다 총을 맞고 숨졌다.
박강배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기존엔 매년 기념식의 방향, 경과보고, 단어와 키워드 등을 기념식 주관처와 5·18기념재단, 유족회 등이 협의해왔는데 언젠가부터 당사자들이 배제됐다”며 “당사자 단체를 배제한 채 일을 하는 보훈부의 한계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유족들이 항의하는 등 논란이 불거지자 “사실관계 확인 결과 영상 제작 과정에 착오가 있었다“며 ”오늘 해당 유족들을 직접 찾아가 사죄드릴 계획이다. 향후에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해명했다.
●시의원들, ‘헌법 수록’ 요구하며 기습시위
윤석열 대통령 기념사 도중 광주시의회 5·18특별위원회가 ‘5·18 헌법 수록’를 요구하는 기습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정다은 5·18특별위원장을 비롯한 8명의 의원은 윤 대통령 기념사가 시작되자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종이 한개씩을 펼쳐 들었다. 종이에 있는 글자를 조합하니 ‘5·18 헌법 전문 수록’이라는 문구가 만들어졌다. 시의원들은 기념사가 끝날 때까지 윤 대통령이 있는 방향으로 종이를 높이 들었다.
의원들의 시위가 끝나자 주변에 앉아 있던 유족들은 손을 높이 흔들거나 박수를 치며 크게 환호했다. 경호원이 시의원들의 시위를 제지하려고 하자 ‘그냥 하게 냅둬라’, ‘약속한 것이니 지켜야지’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정다은 5·18특별위원장은 “윤 대통령은 5·18 헌법 수록에 대해 의지조차 없는 것 같다”며 “지난해에 이어 올해마저도 기어이 헌법수록을 언급하지 않았다. 정부는 입으로만 오월정신을 말하면서 5·18 관련 예산을 줄줄이 삭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상아 기자·나다운·박찬·윤준명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