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이야기>충무공도 마셨던 '장군차'… 연녹색 녹차향 가득
●보성 다전마을
李, 수군 재건 위해 마을 찾아
양산항 집 곡식, 군량미 삼아
명량대첩 대승… ‘득량’지명도
차 밭 아래 마을 자리해 ‘茶田’
주민 절반 제주양씨 차밭 조성
2024년 05월 16일(목) 17:42
국도변에서 본 다전마을 전경. 마을이 목포-순천 간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다.
다전마을회관. 마을주민들의 쉼터다.
바위 틈에서 400여 년을 산 차나무. 보성차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양산항 집터 앞 연못. 오매정과도 어우러져 멋스럽다.
싱그러운 봄날이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온통 연녹색이다. 차밭도 떠오른다. 발길이 보성으로 향한다. 인지상정이다.

보성은 차의 주산지다. 보성에 대규모 차밭이 조성된 건 일제강점 때다. 활성산 일대가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은 덕분이다. 바다와도 가까워 새벽안개가 자주 끼는 것도 한몫했다. 수분 공급이 잘 되기 때문이다.

보성의 차 재배면적이 1000㏊ 넘는다. 녹차 생산량은 전국의 40%에 이른다. ‘차밭하면 보성, 보성하면 차밭’이 연상되는 이유다. 보성차밭은 가장 인기 있는 남도 여행지 가운데 한 곳이 됐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찾고 싶은 차밭이다.

보성 차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약재(藥材)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엔 토산(土産)으로 기록돼 있다. 득량면에 있는 ‘할아버지’ 차나무가 증거한다. 수령 430년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차수(古茶樹)로 불린다.

고차수는 보성군 득량면 송곡리 다전마을에 있다. 마을이 차밭 아래에 자리한다고 ‘다전(茶田)’이다. 마을 뒷산에 차나무 4만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야생이다. 소나무와 대나무 한데 뒤섞인 차밭이 2㏊ 남짓 된다. 차나무는 연둣빛 찻잎을 날마다 밀어 올리고 있다. 차(茶)의 재료가 되는 찻잎이다.

차는 어린 찻잎을 가공해 만든다. 찻잎은 맑은 날 새벽이슬이 덜 마른 때 딴 것을 으뜸으로 친다. 찻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차의 이름도 달라진다. 곡우 전후로 딴 찻잎을 덖은 차가 ‘첫물차’다. 두물차, 세물차, 끝물차도 있다. 처서와 백로 사이에 딴 찻잎은 음료로 가공한다.

차를 만드는 방법과 발효 정도에 따라 이름과 맛도 다르다. 발효 여부에 따라 불발효차, 반발효차, 발효차로 나뉜다. 절반가량 발효시키면 우롱차, 85%이상 발효시키면 홍차다. 녹차는 발효시키지 않고 찻잎을 덖거나 찌는 방식으로 수분을 뺀다. 녹차는 불발효차에 속한다.

바위틈에서 질긴 생명력을 이어온 고차수는 마을주민과 희로애락을 같이 했다. 나라의 위기와 극복 과정도 묵묵히 지켜봤다.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이유다. 주민들은 해마다 고차수 앞에서 다신제를 지낸다. 올해도 지난 4월23일에 지냈다.

전라도 백성과 함께 나라를 구한 이순신도 이 차를 마셨다고 전해진다. 차는 할아버지·할머니를 거쳐 아버지·어머니로 이어졌다. 마을사람들은 ‘장군차’, ‘이순신장군차’로 부르고 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약차(藥茶)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순신이 이곳 차와 만난 건 정유재란 때다. 궤멸된 조선수군을 재건하면서 명량대첩을 하러 가던 길에서다. 이순신은 고내마을 조양창에서 많은 군량미를 얻은 직후 다전마을을 찾았다. 다섯 개의 봉우리가 기암괴석을 이룬 오봉산(392m) 자락을 따라 지금의 대동, 청능, 신방, 감동, 호동, 파청마을을 거쳤다.

이순신이 다전마을을 찾은 건 영해부사 양산항(1554~1634)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양산항은 이 일대에서 큰 부자였다. 참봉 양응덕의 아들이고, 학포 양팽손의 손자다. 기묘명현의 후손이다. 기묘명현은 정암 조광조와 함께 중종 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림을 가리킨다. 이순신과는 대대로 정을 나눠왔다.

이순신은 양산항의 집에 있는 곡식을 군량미로 삼았다. 조양창과 양산항 집에서 식량을 구한 이순신은 군량미 걱정을 떨칠 수 있었다. 명량대첩의 기반을 닦은 셈이다. 이 일대 지명이 ‘득량(得糧)’인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이순신이 군량미를 구한 양산항의 집터가 다전마을에 있다. 석축을 길게 쌓아 만든 연못과 맞닿아 있다. 매실나무 다섯 그루 아래 있었다는 오매정(五梅亭)도 복원됐다. 오매정은 20여 년 전 문화마을 조성사업 때 세웠다. 매실나무 다섯 그루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오매정 옆에 양우급 유장비(遺庄碑)도 있다. 전라병마절도사를 지낸 양우급의 옛집임을 알려주는 비석이다. 양우급은 양산항의 증손자다. 오매정을 짓고 연못을 넓혀 쌓았다.

다전마을은 제주양씨로 자작일촌을 이루고 살았다. 지금도 주민의 절반 가량은 양씨다. 후손들은 야생 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차를 만들어 마신다. 동과를 이용한 다식도 곁들인다. 동과는 기다란 원통이나 타원형의 수박처럼 생겼다. 오이나 참외 맛이 나는 별미다. 이순신과 조선수군도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래는 데 요긴하게 썼다고 전한다.

마을에 공동 우물도 있다. 오래전 아낙네들이 한데 모여 빨래하던 곳이다. 지금도 가끔 허드레 빨랫감을 갖고 와 헹구는 어르신을 만날 수 있다. 전통한옥 주월재도 마을에 있다. 100여 년 된 옛집이다. 원형을 살리면서 시설을 편리하게 개보수했다. 한옥민박으로 쓰고 있다.

한낮의 햇살을 받은 찔레꽃이 골목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마을 앞 들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길손의 마음까지도 넉넉하게 해주는 농촌이다. 마을 앞으로 난 목포-순천 간 국도를 오가는 차량만 부산하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