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참지 못하고 무장 항쟁…지역방위대 편성 지휘
●5·18 민주화운동 44주년
태봉마을의 비극 <4>문장우 지역방위대장
학운동서 총격전…사복 군인 연행
경찰에 자수…물고문·폭행 시달려
“순수한 대동정신 후세에 알려야”
2024년 05월 13일(월) 18:23
1991년 문장우씨 모습. 광주 동구의회 제공
“그 누가 싸움을 좋아하랴만 불의보고 피한다면 사내 아니다…”

1980년 동구 학운동 예비군 소대장이던 문장우(74)씨의 입에서 오래된 군가가 흘러나왔다. 나이 일흔을 훌쩍 넘겨버린 그가 기억하는 5·18민주화운동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지만 매년 오월이 될 때마다 떠올리는 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도, 광주의 허공을 갈랐던 총성도 아니었다. 문씨가 5·18 당시 총을 들고 광주 지역방위대장으로 나선 건 죄없는 광주시민들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참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고도 대한민국 군인이냐”

1980년 5월20일 문씨는 광고대행사 삼보문화사의 광주전남지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다방에서 친구와 사업계획을 의논하던 중 충장로 파출소 앞에서 7~8명의 학생들이 공수대원들에게 쫓기는 장면을 목격했다. 학생들을 붙잡지 못한 공수대원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어 곤봉으로 마구 내려쳤다. 그중 한 공수부대원이 여학생을 붙잡아 길바닥에 내동댕이 쳐 옷이 다 벗겨졌는데도 지하도로 질질 끌고 가는 광경을 지켜봤다. 문씨는 행패를 부리는 공수부대원들에게 “너희들이 대한민국 군인이냐. 죄 없는 사람들까지 왜 때려!”라고 소리치며 시위에 합류했다. 당장의 일과 처자식이 눈에 밟혔지만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군인들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두들겨 패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21일 전남도청 앞 공수부대가 집단발포를 하자 맨주먹으로는 싸울 수 없다 생각해 시민들에게 외쳤다.

“저는 학운동 예비군 소대장인 문장우입니다. 현재 공수부대가 무차별 발포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돌멩이나 각목 따위로 싸울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무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청년들을 규합해 나주, 화순, 전남방직, 일신방직 등지에서 무기를 구했다. 문씨는 총을 배분한 후 총기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교육을 진행하고 지역방위대 12개 조를 편성했다. 그리고 기본적인 총기 사용법과 주의사항을 일러줬다.

● 계엄군과 직접 교전 벌여

당시 배고픈 다리(홍림교)를 중심으로 집중배치 후 암구호를 정하고 주민들로부터 주먹밥 등 식량을 보급받았다. 교대로 순찰하며 최전방에서 진두지휘를 하던 중 23일 오전 1시30분께 조선대 뒷산의 숙실부락에서 7·11공수여단의 군홧발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냇가를 건너면서 랜턴을 잠깐씩 비추며 이동했다. 본부와 약 200m 남짓한 거리였고 호산나유치원을 방위하던 6·7조가 먼저 사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계엄군 역시 총을 쏘며 접전이 벌어졌다. 30여분의 총격전이 있었고 해가 밝자마자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자가 있었는지 확인했으나 다행히 다치거나 사라진 이는 없었다. 다만 배고픈 다리 난간에 남은 총탄 자국만이 격렬했던 교전을 증명했다.

23일 오전 석가탄신일이었던 21일 증심사로 불공을 드리러 갔던 이들이 하산하고 있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문씨는 시민들 틈에 사복을 입은 젊은 청년 2명을 붙잡았다. 민간인을 사찰하기 위해 위장한 공수부대원이었다.

이를 본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을 죽여버리자고 다같이 입을 모았지만 문씨는 “우리 동포니 죽이지 말자”며 화난 민중들을 달랬다.

이후 도청 순찰반으로부터 무기를 회수하겠다는 요청에 고심이 깊었지만 결국 반납하고 지역방위대는 이틀만에 해산됐다.

● 항쟁 후 끔찍한 고문 시달려

문씨는 “27일 아침 계엄군의 도청 장악 소식을 들었다.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그저 울분에 못이겨 통곡했다”고 설명했다.

항쟁이 끝나고 문씨는 농성동에서 신혼살림을 하던 친구집에서 한 달여간 피신했다. 그러나 본인이 숨어지내는 동안 예비군 중대장이 끌려가 폭행을 당하고 지원동에 사는 아는 형님을 찾아가 못살게 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결국 6월26일 광주경찰서 정보과로 가서 자수했다.

그 후 끔찍한 고문이 이어졌다. 문씨는 “물고문은 기본이고, 손가락에 볼펜을 끼워서 뼈가 드러나도록 짓눌러대고, 온몸을 묶은 채 들것에 실어 불개미가 득실거리는 나무 밑 잔디밭에 던져두기도 했다”며 “피신한 장소를 대라는 형사의 윽박질에 내 목숨은 버려도 나를 숨겨준 친구만은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버텼다”고 이야기했다.

지역방위대에 참가한 사람들 또한 끌려가 하나같이 문씨를 대장으로 지목했기에 그에게 가해지는 고문의 강도는 남들보다 몇 배 이상이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불려가 고초를 겪었다. 차라리 총으로 죽여달라고 외칠만큼 모진 고통을 이 악물며 참았던 탓에 석방 후에는 양쪽 어금니가 빠져버렸다.

● “5월 대동정신 계승해야”

문씨는 숱한 고문 끝에 내란죄로 15년형을 받고 10개월간 수감됐다가 1981년 4월3일 사면으로 석방됐다. 그러나 가정은 풍비박산 나있었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문씨는 1991년부터 5년간 동구의회 구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5·18 단체의 전신격인 5월 광주민중항쟁동지회 부회장으로, 구속부상자회 이사장, 비상대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 2019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현재는 대학 여러 곳에서 풍수지리학을 강연하고 있다.

문씨는 5·18 단체들이 잘못을 바로잡고 80년 5월의 순수했던 대동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항쟁 기간 동안 온갖 고문과 옥살이를 겪었던 사람은 거의 사라지고, 사리사욕만을 탐하는 이들이 5월 단체를 이끌어가는 상황”이라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좀도둑 하나 없던 광주의 대동정신과 이를 미래세대에게 제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역사의식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혜인 기자 hyein.kim@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