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최철의 오페라 오디세이>‘빛나는 추억’…푸치니가 사랑한 지휘자 토스카니니
<푸치니 서거 100주년-⑤지휘자 토스카니니>
라 보엠·토스카·나비부인 등 대표작품 지휘
탁월한 음악적 해석 통해 최고 반열 올려놔
‘고도의 지적인 남자’ ‘비범한 음악가’ 극찬
미완성 ‘투란도트’ 사후 푸치니에 영광 안겨
라 보엠·토스카·나비부인 등 대표작품 지휘
탁월한 음악적 해석 통해 최고 반열 올려놔
‘고도의 지적인 남자’ ‘비범한 음악가’ 극찬
미완성 ‘투란도트’ 사후 푸치니에 영광 안겨
2024년 03월 14일(목) 17:05 |
토스카니니와 푸치니는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함께 했다. 사진은 푸치니와 토스카니니. |
토스카니니와 푸치니는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함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작곡가 푸치니의 황금의 시대의 시작인 오페라 <라 보엠>의 초연부터 <서부의 아가씨>, <투란도트> 초연뿐만 아니라 <토스카>, <나비부인> 등 그의 대표적인 작품과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마농 레스꼬>의 리뉴얼 작업의 대성공은 지휘자 토스카니니와 함께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푸치니는 진정한 벗으로 토스카니니를 존경하기까지 하였으며 그를 만난 것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운이었다고 언급했다.
토스카니니와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토스카니니 |
푸치니와 토스카니니의 첫 만남은 토리노 레지오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하게 될 <라 보엠>을 통해서였다. 푸치니는 <마농 레스꼬>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계에서 명성을 쌓아가는 중이었으며, 이제 베르디 이후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반열에 도달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라 보엠>을 푸치니는 당대 저명한 지휘자 레오폴드 무노네가 지휘하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때 당시 무노네 보다 훨씬 지명도도 낮은 젊은 토스카니니가 지휘봉을 잡아서 푸치니는 많은 염려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안했던 푸치니의 마음은 토스카니니의 리허설을 보고 난 후 바뀌어 토스카니니를 찬미하였다고 전해진다. 푸치니는 이러한 상황을 자신의 아내에게 편지로 남겼는데 그를 ‘고도의 지적인 남자’, ‘비범한 음악가’, ‘매력적인 남자’라는 어구 등을 사용해 극찬하였다고 한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토스카니니. |
푸치니는 <나비부인>의 참담한 실패를 예감했다고 한다. 푸치니는 이 실패를 토스카니니가 지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언급했다. 많은 서신을 통해서 토스카니니의 능력을 찬미할 때는 <나비부인>의 실패사례와 재공연의 성공사례를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푸치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조언을 토스카니니에게 부탁했고 그의 조언에 따라 초연 때 과감히 하지 못했던 <나비부인> 2막 형식의 스코어를 교정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파가니니와 함께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오페라 극장의 <나비부인> 공연은 대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으며 이어 제작된 벨라스코의 희곡을 오페라화한 <서부 아가씨>는 토스카니니의 해석으로 창조되어 초연에 올려졌다. <서부의 아가씨> 초연에서 작곡가가 쉰 다섯 번의 커튼콜을 받았다고 미국 메트로폴리탄 초연 기록은 알리고 있었는데, 이는 토스카니니가 아니면 이루어 낼 수 없었다고 푸치니는 언급했다. 푸치니는 이 작품을 위해 비아레쪼의 자신의 집으로 토스카니니를 자주 초대해 조언 구하는 등 함께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후 푸치니와 토스카니니의 우정은 푸치니의 히스테리와 토스카니니의 어린애 같은 행동으로 두 번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푸치니의 죽음을 앞두고 둘은 극적인 화해를 했다. 푸치니는 후두암으로 투병을 하면서 <투란도트>를 쓰고 있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이 작품을 성공적으로 올리기 위해서는 토스카니니가 절실히 필요했으며, 그만이 자신의 이 대형 프로젝트를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성공적으로 올려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푸치니의 토스카니니를 향한 사과와 편지에 응답은 토스카니니의 갑작스러운 비아레쪼의 방문으로 이루어졌다. 이 만남은 두 사람 앞에 놓인 불신의 거대한 벽을 무너뜨렸다. 푸치니는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이제 나는 너무 행복하답니다. 토스카니니에 의해 태어난 <투란도트>는 가장 멋진 공연이 될 것이오…”라고 언급했다. 비록 푸치니의 죽음으로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된 <투란도트>였지만, 토스카니니에 의해 태어난 이 작품은 사후 푸치니에게 큰 영광을 안겼으며, 이 작품은 두 음악가의 우정의 서사로 남겨진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푸치니의 죽음을 스칼라 극장에서 오케스트라 리허설 도중 듣게 된 토스카니니는 지휘봉을 던지고 달려 나가 분장실에서 서럽게 통곡하여 울었다고 전해진다. 둘의 우정은 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음악 안에서 극복하고 오페라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푸치니가 상상한 모든 것을 제대로 해석하고 최고의 경지에 올려놓은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서거하고 100년이 지난 그의 음악에 열광할 수 있게 만든 오페라계의 최고의 요리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대 초빙교수·문화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