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메마르고 뒤틀린 시대… 그 안팎에 움트는 생명
375)조각가와 소설가의 어떤 해후(邂逅)
“해골은 이미 추악함을 벗어났고 나비 또한 이미 아름다움을 벗어났으니 둘 사이에 그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내 연구의 평생 화두인 재생과 거듭남에도 맞닿아 있는 생각들이다”
“해골은 이미 추악함을 벗어났고 나비 또한 이미 아름다움을 벗어났으니 둘 사이에 그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내 연구의 평생 화두인 재생과 거듭남에도 맞닿아 있는 생각들이다”
2023년 12월 14일(목) 12:46 |
송기원, 강대철 특별전-해남땅끝순례문학관 제공 |
송기원, 강대철 특별전-해남땅끝순례문학관 제공 |
송기원, 강대철 특별전-해남땅끝순례문학관 제공 |
해골과 나비의 해석, 향아설위(向我設位)에서 호접몽(胡蝶夢)까지
전시장 입구에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해골을 떠받치고 있는 조각품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강대철이 빚은 송기원의 손이고 송기원의 해골이다. 스스로 자신의 해골을 모아들고 있으니 시천주요, 또 다른 몸 나비가 되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향아설위다. 주지하듯이 동학 즉 천도교의 시천주(侍天主)는 내 몸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뜻이고 향아설위(向我設位)는 제사상을 벽을 향해 차리지 않고 자손들을 향해 차리는 법식을 말한다. 한울님이 항상 내 마음에 계시니 내가 한울님이다. 그러하니 또 무엇을 향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은 전태일 분신 사건을 접한 후, 문익환, 서남동 목사 등이 ‘오늘은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전태일의 이름으로 기도하겠다’고 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공자나 예수 혹은 최재우 등의 온전한 면모를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송기원과 강대철의 작업은 예술작업을 넘어선 신인일체(神人一體)의 기능을 깊숙하게 포섭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송기원의 해골 그림에는 마치 세트처럼 나비와 꽃과 혹은 그 무엇들이 직조되어 있다. 해골과 나비, 해골과 꽃, 죽음과 삶 혹은 절망과 희망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그이들의 만년의 벗 유홍준이 화답한 장문의 평론에 그 일단이 보인다. ‘시인의 초상, 또는 조각가의 상념’이라는 전시회 표제부터 그러하다. 오프닝 작품해설에서 제창한 기격(奇格)이라는 조어(造語)도 이같은 해설을 반영한다. 기이하고 기발한 품격이라는 뜻이다. 유홍준은 이렇게 말했다. “추악함과 아름다움의 경계, 인생 말년에 한반도의 땅끝 해남과 장흥에 머리를 기댄 송기원과 강대철의 애틋한 해후(邂逅)를 담담하면서도 감동적인 필체로 그려냈다.” 하지만 송기원의 독백을 보면, 추악함과 아름다움의 대칭성 혹은 삶과 죽음 등의 직유보다는 오히려 장자의 인유(引喩)에 가깝다. 송기원은 이렇게 말한다. “화선지 한쪽에 해골을 그려놓고는 그 여백에 글을 쓸 것이오. 나에게 해골은 자신을 밤낮없이 바라보고 있는 내면의 눈길입니다. 내면의 눈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제 얼굴에 있는 눈의 눈길이 아니라 또 다른 눈길을 말합니다. 사마타 명상....” 그렇다. 불도를 닦기 위해 잡념을 버리고 정신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명상 말이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가 이렇게 해석한다. 예컨대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나비의 꿈을 해석하는 시선이다.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물화(物化)의 시선, 혹은 나비와 장주(장자의 이름)가 사실은 한 몸이라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시선 말이다. 해골은 이미 추악함을 벗어났고 나비 또한 이미 아름다움을 벗어났으니 둘 사이에 그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내 연구의 평생 화두인 재생과 거듭남에도 맞닿아 있는 생각들이기에 거듭하여 이 작품들을 감상하는 중이다.
남도인문학팁
송기원과 강대철의 헝거스톤(hunger stone)과 레퓨지아(refugia)
강대철의 작품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갈라지고 부르튼 균열과 그 안에 싹튼 어떤 생명이다. 송기원의 심상을 끌어다 부조한 작품 만이 아니다. 스무 해 성상 장흥 토굴작업에 매진하여 작품세계가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초기 작품들과 토굴의 원형적 형상을 연결해 보면 시종(始終)을 관통하는 내력이 보인다. 극심한 가뭄에 공처럼 움츠렸다가 수분을 받으면 재생하는 부활초(復活草)같은 ‘이미저리’라고나 할까. 송기원이 말년에 천착한 화제(畫題) 또한 각양의 해골과 그 안팎에 움트는 꽃과 나비들이니 두 거장의 세계가 다르지 않다. 품은 철학이 이러하니 남도 땅끝마을에서 아름다운 해후를 할 수 있었으리라. 나는 이 작품들을 통해 헝거스톤(hunger stone)을 읽고 레퓨지아(refugia)를 읽었다. ‘내가 보이거든 울어라!’, 가뭄으로 강과 호수가 마르면 드러나는 헝거스톤의 경고는 오래전 유럽의 돌이 아니라, 기후위기의 시대, 아니 휴머니즘을 통째로 상실한 우리 시대를 경고하는 문구일 것이다. 졸저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다ᄒᆞᆯ미디어)에서 누누이 강조했던 것도, 빙하기의 생명 공간 레퓨지아였다. 헝거스톤이나 레퓨지아처럼 메마르고 뒤틀린 시대를 강대철은 조각이라는 이름으로, 송기원은 해골 나비와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실상을 드러내 보인 것 아니겠나. ‘해남땅끝순례문학관’, <시인의 초상, 또는 조각가의 상념> 특별전은 2023년 12월 31일까지 전시된다. 문의는 총괄 기획 이유리 학예사에게 하면 된다. 전화: 061-530-5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