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이순신 첫 수군(水軍) 근무… 남도사람들과 인연 싹터
●고흥 발포마을
“뜰의 오동나무도 나라의 것”
청렴 기리는 마을광장 글귀
사당 충무사 주민 성금 건립
거북선 만든 굴강屈江) 남아
김 양식… 주민들 풍족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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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30일(목) 13:25 |
굴강.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
노거수와 어우러진 기념비. 비석에 ‘이충무공 머무시던 곳’이라고 새겨져 있다. |
발포항. 발포방파제에서 본 풍경이다. |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충무사. 발포진성과 자란히 자리하고 있다. |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는 고흥 발포다. 발포 앞바다는 조선시대에 조운선(漕運船)이 다니던 바닷길이었다. 조운선은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싣고 서해안을 거쳐 한양과 개경으로 올라갔다. 바닷바람이 거칠고 파도가 높을 때면 쉬어가기도 했다. 지금도 매한가지지만 남해에서 서해로 가는 배는 고흥 남쪽 해안을 지나야 한다. 고흥은 요충지였다.
바다에서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아스라이 보인다. 한 폭의 그림이다. 흡사 돌로 만든 문(門)처럼 생겼다. 활개바위다. 조선시대에 해상훈련을 하던 수군의 모습을 닮았고, 돛배가 활개를 치는 것처럼 보인다고 ‘활개바위’로 이름 붙었다.
활개바위는 ‘이순신바위’로도 불린다. 이순신이 이끈 함대가 활짝 편 학의 날개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얘기라는 게 마을 어르신들의 말이다.
발포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에 속한다. 포구의 모양새가 스님의 밥그릇을 닮았다고 ‘발포(鉢浦)’다. 마을에 성이 있었다고 ‘성촌’ ‘성포’ ‘성두’로도 불렸다. 마을 뒷산에 백로·왜가리 서식지도 있다. 지난 봄 찾아온 백로와 왜가리 떼는 내년 봄을 기약하고 가을에 떠났다. 발포해수욕장도 멋스럽다.
마을 앞 도로변에서 노거수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나무 아래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에 ‘이충무공 머무시던 곳’이라고 새겨져 있다. 기념비는 1955년에 세워졌다.
발포마을은 이순신과 엮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이 이곳에 머물렀다. 이순신이 36살 때인 1580년 종4품 만호(萬戶)가 돼서 발포에 왔다. 만호는 오늘날의 해군대대장(중령급)에 해당된다. 재임기간은 1년 6개월이었다. 이순신은 왕명을 받은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 서익의 ‘무기관리 소홀’ 보고에 따라 파면됐다. 군기경차관은 군부대 검열관을 일컫는다.
이에 앞서 이순신은 32살(1576년)에 급제하고 그해 12월 동구비보(함경도 삼수)의 군관(종9품)으로 발령받았다. 1579년 2월엔 훈련원 봉사(종8품)로 승진, 한양에서 생활했다. 같은해 10월 충청병영(서산 해미읍성)으로 밀렸다. 병조정랑(정4품) 서익이 자신의 친지를 특별 승진시키려는 데 대해 항의하다가 좌천된 것이다. 병조정랑은 지금의 국방부 인사과장 급이다. 이순신의 발포만호 파면도 서익의 보복성이 짙었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이순신의 발포 부임은 큰 의미를 지닌다. 종8품에서 여러 단계를 건너뛴 초고속 승진이었다. 뭍에서만 복무했던 이순신이 처음 수군(水軍)으로 발령받고, 근무한 곳이다. 이순신에게 발포만호는 첫 지휘관 경험이었고, 전라좌수영과의 인연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발포만호로 있으면서 남해안의 실상을 속속 들여다봤다. 바닷길도 체험했다. 평생 후견인이 될 남도사람들과의 인연도 여기서 맺기 시작했다.
발포만호 이순신은 청렴하고 강직한 생활을 보여줬다. 이에 따른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순신의 행적과 일화, 일기, 장계 등을 망라해 1795년에 펴낸 〈이충무공전서〉에 나온 이야기다.
당시 발포진성 객사 뜰에 큰 오동나무가 있었다. 이순신의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부하에게 오동나무를 베어 오도록 했다. 좋아하는 거문고를 만들 욕심이었다. 하지만 전라좌수사의 하급자인 만호 이순신에 의해 거절당한다. 관청의 재물인데, 사사로이 쓸 수 없다는 이유였다.
화가 난 성박은 이순신을 쫓아내려고 뒷조사를 했다. 이순신의 비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조사할수록 청렴하고 강직하다는 이야기만 나왔다고 한다.
발포마을에 이순신의 청렴을 기리는 광장이 만들어진 이유다. 너럭바위에 이순신의 청렴을 기리는 글귀(뜰의 오동나무도 나라의 것)가 새겨져 있다. 주변에 오동나무 몇 그루도 심어졌다. 최근에 부러 심은 것이다. 청렴서약을 담은 박석 수천 개도 주변에 깔려 있다.
이순신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 충무사도 마을에 있다. 1977년에 주민의 성금과 지방비를 더해 세웠다. 주민들은 해마다 4월 28일 이순신 탄신 때 다례제를 지내고 있다.
이순신이 수없이 드나들었을 발포진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일부는 복원했다. 진성은 1490년에 둘레 560m, 높이 4m로 쌓았다. 도제산 남쪽으로 포구와 이어지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성곽은 해안선을 따라 일직선, 성벽은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 평지의 읍성과 산성의 절충형인 평산성이다.
성안에서 동헌과 객사, 동·서·남문, 망루 터가 확인됐다. 일부 성벽은 민가의 담장으로 쓰이고 있다.
거북선을 만든 굴강(屈江)도 바닷가에 남아 있다. 오늘날의 조선소인 셈이다. 이순신과 발포, 이순신과 함께 한 고흥사람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야기를 보여주는 발포역사 전시체험관도 바닷가에 들어서 있다.
발포는 한반도의 남단 고흥, 고흥에서도 남쪽 끄트머리에 딸린 작은 포구다. 그럼에도 ‘부자마을’이다. 김 양식을 많이 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성웅 이순신과 임진·정유재란을 극복한 호남사람들의 투혼도 오롯이 살아 숨쉬고 있다. 작지만 큰 포구, 발포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