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서법(書法)과 서도(書道)를 뛰어넘는 서예(書藝)
366)서예(書藝)
“중국의 서법(書法)과 일본의 서도書道)에 대응하는 한국의 지극한 예술적 경지를 표방한 서예(書藝)…이를 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한글이다”
2023년 10월 12일(목) 14:09
영화 영웅-천하의 시작 중 한 장면 -인터넷 캡처
영화 영웅-천하의 시작 중 한 장면-인터넷캡쳐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 소전 글씨
칼로 모가지를 베랴 붓으로 치랴

무명의 검객이 칼 대신 큰 붓을 들어 글자를 써 내려간다. 글씨는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기도 하고 거대한 파도처럼 급습해오기도 하며 사막을 내닫는 말처럼 쏜살같기도 하다. 글자를 쓰는 듯한데 글씨가 아니요, 붓을 휘두르고 있어도 붓이 아니다. 때때로 모래판을 그어 내리는 지팡이가 되었다가 적의 목을 베는 예리한 칼이 되었다가 철학의 기운을 뿜어내는 장필(長筆)이 되기도 한다. 알지 못할 차원의 춤과 검객의 도술을 거쳐 마침내 진시황의 용좌에 검(劍)이라는 글자가 걸린다. 장이머우의 영화 ‘영웅-천하의 시작(2002)’ 얘기다. 내용이야 진시황 암살 기도를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시종 화려한 칼춤이 일이관지한 영화다. 장이머우의 영화가 붉은색을 강조하는 등 중국의 제국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편에 서 있다는 점에서 호평하기는 어렵다. 나는 다만 공중을 날아다니는 화려한 칼춤, 모래밭을 달려나가는 발디딤, 음과 양으로 대칭을 이루는 칼싸움과 붓글씨를 주목하고자 이 장면을 꺼냈다. 영화에서는 붓과 칼을 다루는 기술을 동일하게 그린다. 내가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주인공 이연걸이 빗살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을 붓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진시황에게 거대한 장필(長筆)을 주고 황야를 달리는 백마처럼 재빠른 발디딤새로 나아가게 하고 소용돌이치는 바람처럼 공중을 날아 되돌아오게 하며 붓으로 모가지를 긋는 장면 말이다. 기원전 213년 분서(焚書)와 갱유(坑儒)의 역설을 한 장면에 중첩시키는 효과랄까. 영화는 시황제와 중국의 시작을 다루었지만, 결국 시황이 칼로 베어낸 글과 학문의 모가지는 잘리지 않았고 역설적으로 글과 학문이 중국을 중국답게 했다. 그저 생각한다. 칼과 붓은 같으면서 다르다. 총보다 강한 펜이라느니, 칼보다 강한 붓이라느니 하는 언설이 왜 나왔겠는가. 운행의 몸놀림은 같아도 결국 위대한 것은 붓이다.



서예(書藝)는 서법(書法) 서도(書道)와 어떻게 다르고 같은가?

글씨를 붓으로 쓰는 예술, 서예(書藝)에 대한 국어사전의 정의다. 순 우리말로 붓글씨라 한다. 서도(書道)는 글씨를 쓰는 방법 또는 그를 배우고 익히는 일이다. 붓으로 글씨를 쓰는 일 외에 그것을 올바로 쓰는 법을 배우던 예능을 포괄하는 용어다. ‘올바로’라는 전제에는 유교 이데올로기 등 각시기의 시대정신이 들어있다. 서법(書法)은 글씨를 쓰는 법에서 나아가 문장을 쓰는 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필찰(筆札)이라고도 하는데, 붓과 종이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부터 글씨의 모양이나 솜씨라는 뜻을 포괄한다. 문장을 쓰는 법이라는 해석에는 넓은 의미의 문학을 포괄하는 시선이 있다. 본래 한문을 중심으로 서예가 발달했으므로 고대로부터 발달한 것이 서법이다. 지금의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가 원적지다. 이 나라들을 묶어 한자문화권이라고 한다. 그런데 같으면서 다른 것이 있다. 붓으로 행하는 기술 혹은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중국은 서법(書法)을 중시하고 일본은 서도(書道)를 중시하며 한국은 서예(書藝)를 중시한다. 영어로 Calligraphy(서예)를 넘어 Craft(공예)와 비교할 수 있다. 본래 한자가 그림문자에서 출발하였음은 상형(象形)문자라는 용어에서 드러난다. 어떤 물건의 모양을 본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랍의 그림문자 심지어는 로마글자조차도 본래는 그림에서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차(茶)를 대하는 태도와 시선에 견주어볼 수 있다. 다도(茶道)라는 호명은 일본적인 시선이 강조된 용어다. 다법(茶法)은 중국적인 태도가, 다예(茶藝)는 한국식 태도가 강조되는 용어다. 사전적 정의나 통용되는 현행 용어는 다도이다. 그러나 한국의 다도(茶道)를 왜 차예(茶藝)로 바꾸어 호명해야 하는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따로 지면을 내 설명하겠다. 중국의 서법과 일본의 서도-베트남은 좀 더 연구해보겠다-에 대해 상고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서예(書藝)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여기에 법(法)과 도(道)를 뛰어넘는 지고한 예(藝)의 세계를 해명해야 할 과제가 들어있다. 그것은 한자로부터 시작하여 한글에 이르는 서예의 특성을 드러내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이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중심성을 들어 이렇게 정의한다. 글의 도(書道)를 알아차려 한해륙의 법(書法)으로 행한 예술이 한글서예다.



남도인문학팁

서예의 탄생, 동국진체(東國眞體)에서 소전체(素筌體)까지

김도영은 ‘소전 손재형의 서예 미학 고찰’(호남문화연구 64집)에서 이렇게 말한다. “동국진체는 서예의 근본으로 복고하기 위해 18세기에 고안한 우리 고유의 법고적, 주체적, 자각적 서풍이다. 이러한 서풍은 옥동(玉洞) 이숙(李淑, 1662~1723)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공제(恭齊) 윤두서(尹斗緖, 1668~1715)에게 전수되었다. 공제는 자유분방한 필치에 여유와 해학을 내재시켜 형상성과 자연미를 추구하였다. 이후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이 온아단정한 서체로 동국진체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냈다. 윤순의 수제자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동국진체의 서풍을 이루었다.” 이후 호남지역에 자리 잡은 서풍의 주역들에 대해서는 기회를 보아 따로 다룬다. 주지하듯이 원교 이광사는 1775년 소론 일파의 역모 사건에 연좌되어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가 1762년부터 완도 신지도에 이배되어 모진 목숨을 소진한 사람이다. 본래의 이배지가 진도였기에 진도 서풍의 영향설을 얘기한다. 신지도로 이동한 일정이 매우 짧다는 점 등을 들어 과연 영향을 끼쳤겠는가 하는 반론도 있다. 그렇더라도 대개의 유배자들이 끼친 광역 공간의 영향 등을 상고하면 나는 이광사가 충분히 진도지역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김도영 외 몇 연구자들에 의해 추적된 소전 손재형의 예술세계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이 영향 관계는 드러난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소전 손재형의 한글서예이다. 일반적으로 대할 수 있는 곳이 진도 벽파에 세워진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의 글씨다. 김도영의 표현에 의하면, 소전은 전서(篆書), 예서(隷書)와 한글 고체를 바탕으로 한 소전체(素筌體)라 불리는 한글 서체를 개발하였고 진도가 자랑으로 꼽는 남종문인화와 전각(篆刻)까지 겸통한 인물이다. 특히 일제 잔재인 서도(書道) 대신 새롭게 서예(書藝)라는 용어를 창안하여 제안하면서 공식적인 명칭이 되게 하는 등 한국서화예술 발전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것이 중국의 서법과 일본의 서도에 대응하는 한국의 지극한 예술적 경지를 표방한 것이라 보고, 장차 차예(茶藝)와 더불어 더욱 강조해나가야 할 세계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면상 소전의 생애와 예술세계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기로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 스승이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하는 시각이 있긴 하지만, 예컨대 일본으로 반출된 세한도를 되찾아온 장본인이라 점 등 그를 위해 해명할 일이 많다. 동국진체의 계승을 넘어 한글 서체를 창안한 것은 한국식 서예의 탄생이자 한국적 서법의 재구성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소전체가 한글 창제의 원리와 얼마만큼 부합하는가이다. 예컨대 한글 창제의 원리를 말할 때 자음의 창제는 발음기관의 모양을 상형한 것이요, 모음의 창제는 하늘, 땅, 사람의 상징을 상형한 것이다. 중국의 서법과 일본의 서도에 견주어 우리의 서예를 창조한 것은 한글 창제의 도와 법을 알아차려 지극한 예술로 드러내고자 함에 있다. 내가 과문하여 소전의 독특한 서체만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다만 생각한다. 서법과 서도를 뛰어넘는 것이 서예이며, 이를 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한글이다.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