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충무공, 어명 어기고 군마와 쉬었다 간 하얀 모래밭
●보성 명교마을
이순신 장군 조선수군 재건로
넓은 풀밭·모래 해변서 머물다
군마 이끌고 군영구미로 이동
주민들 고흥과 마주한 득량만
바지락·새꼬막·전어·참돔 잡고
‘회천 특산’ 쪽파·감자 재배도
이순신 장군 조선수군 재건로
넓은 풀밭·모래 해변서 머물다
군마 이끌고 군영구미로 이동
주민들 고흥과 마주한 득량만
바지락·새꼬막·전어·참돔 잡고
‘회천 특산’ 쪽파·감자 재배도
2023년 10월 05일(목) 14:58 |
노거수와 어우러진 명교마을 주민쉼터. 그 너머로 득량만이 내려다보인다. |
득량도와 고흥 풍경. 명교해변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
명교해변 풍경. 마을주민이 나무의자에 앉아 득량만을 바라보며 쉬고 있다. |
명교해변의 해넘이 풍경. 명교마을도 금세 어둠속에 잠긴다. |
차밭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율포다. 호수처럼 잔잔한 득량만이 보듬고 있는 해변이다. 은빛 모래와 해송이 조각작품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율포에서 방향을 장흥 쪽으로 잡는다. 길은 회천수산물위판장을 거쳐 명교마을로 이어진다.
이순신 조선수군 재건로다. 이순신 장군이 1597년 8월 17일 지난 길이다. 백의종군하다가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을 다시 받은 이순신은 구례, 곡성, 순천을 거쳐 보성에 왔다.
연안 고내마을 조양창과 다전마을 양산항?김안도의 집에서 많은 군량미를 손에 넣은 뒤였다. 한편으로는 일본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전함의 이동상황도 알아냈다.
완전히 무너진 조선수군이 조금씩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뒤쫓아오는 일본군에 대한 공포나 전투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밤새 큰비가 내리고, 천둥소리에 잠까지 설친 8월 15일 아침이었다. 선전관 박천봉이 왕의 유지를 갖고 왔다. 선조의 명령은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는 ‘조선수군 철폐령’이다.
이순신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동안 모은 병사가 몇 명인데, 확보한 군량미와 무기는, 또 자신한테 의지하고 있는 백성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순신은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죽기로 싸운다면 해볼만 하옵니다. 전선의 수는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로 요약되는 장계다. 육군에 의지에 싸우라는 어명에 따르지 않겠다는 반박이었다. 어명을 거역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괴롭고 참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순신은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해안으로 이동할 준비를 서둘렀다. 바다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이순신은 황대중과 김억추, 조팽년에게 양곡 100석을 진도에 옮겨놓도록 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에게도 전령을 보내 전함을 이끌고 군영구미로 오도록 했다.
전라도에서 병력과 무기, 군량을 확보하는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 전략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반증이다.
8월 17일, 보성읍성을 나선 이순신이 봇재를 넘어 닿은 곳이 명교마을이다. 이순신은 명교마을 백사정에서 군마를 쉬게 했다. 군사들도 물 한 모금씩 마시며 숨을 골랐다. 병사들의 점심도 여기서 챙겼다.
백사정(白沙汀)은 바닷가의 모래인 백사(白沙)와 물가의 모래섬(汀)이 만나는 곳을 가리킨다. 영천강, 봉강천, 회령천의 물이 흘러들어 모래톱이 만들어졌다. 명교에서 모래톱에 이르는 백사장이 10리 남짓 됐다. 우물이 있고, 식수도 풍부했다.
백사정 주변에 풀밭도 넓었다. 말에 먹일 풀이었다. 말을 먹여 기르는 목마장이 인근에 자리한 것도 풀이 많아서다. 드넓은 풀밭과 모래 해변은 군대가 머물기에도 좋았다.
이순신은 백사정에 군사들을 줄지어 서게 했다. 병사의 숫자가 120여 명에 이르렀다. 군사를 다시 점검한 이순신은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이순신의 마음은 벌써 배설의 함대가 기다리고 있을 군영구미(軍營仇未)에 가 있었다. 이순신에게 군영구미는 내륙에서의 마지막 행선지로 그려져 있었다.
백사정이 있던 명교(明敎)마을은 신리, 이문과 함께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벽교리에 속한다. 율포리와 전일리 사이, 득량만에 자리하고 있다. 장흥 회령면에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보성 회천면이 됐다. 능주에 살던 이천 이씨가 임진왜란 때 피난 왔다가 처음 정착했다고 전한다.
마을에서 옛 모래톱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제주 개발사업을 위해 정부에서 모래를 다량 채취하면서 사라졌다. 백사장은 여전히 넓다. 해안 도로를 따라 소나무도 줄지어 있다. 물놀이를 즐기기에도 좋은 해변이다. 명교해수욕장으로 불린다.
밀물 때 드러나는 갯벌에는 바지락과 새꼬막이 지천이다. 낙지, 키조개도 많이 산다. 바다에선 전어, 참돔이 잡힌다. 고흥과 마주한 득량만은 마을사람들의 생활 터전이다.
농사를 짓는 주민도 절반가량 된다. 마을 앞을 누렇게 물들이고 있는 벼논이 주민들의 식량창고다. 회천특산으로 널리 알려진 쪽파와 감자도 재배하고 있다.
백사정을 떠난 이순신은 해안길을 따라 군영구미로 향했다. 배설이 이끌고 있는 함대 12척을 찾아서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