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남도를 굽이돌아 중국·유럽까지 차선고도 프로젝트를
364) 차선고도(茶船古道)
“근자 들어 차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초의에 대한 관심 또한 확산되었고 초의에 관한 연구들도 쏟아져 나왔다. 나는 지난해 출간한 졸저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에서 차선고도를 제안한 바 있다.”
“근자 들어 차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초의에 대한 관심 또한 확산되었고 초의에 관한 연구들도 쏟아져 나왔다. 나는 지난해 출간한 졸저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에서 차선고도를 제안한 바 있다.”
2023년 09월 21일(목) 15:53 |
초의생가에서 진행된 어린이 프로그램-이윤선 촬영 |
무안군 삼향읍 왕산마을 초의생가 |
초의생가앞 초의동상-이윤선 촬영 |
광주전통문화관에서 초의다례로 진행된 추모의례 |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향과 약을 캐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 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초의선사가 일지암을 짓고 지은 시다. 내 심중에 담아두었다가 가끔 꺼내 노래하는 시이기도 하다. 나 또한 무안군 삼향읍 초의의 생가터 아래, 책 몇 권 보관할 만한집을 지어 사는 인연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지암을 아는 사람들은 이 시가 형용하고 있는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풍경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짙은 운무 출몰하는 비경과 초암에 앉아 차 한잔하는 즐거움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초암(草庵) 곧 일지암의 난몰(難沒)하는 연하(煙霞)는 변함이 없다. 예서 이룬 인연인들 크게 다르겠는가.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각양의 인사들과의 교류가 낳은 총화의 터일 것이니, 마치 안개와도 같고 북새(노을)와도 같은 옛 인연들이 언제인들 새록새록 하지 않겠는가. 나는 지난 2018년 본지 칼럼(1월 12일자)을 통해 초의 장의순을 소개한 바 있다. 초의의 출생과 성장, 어린 나이에 운흥사로 출가하는 내력들이 그것이다. 기회를 봐서 밝히겠지만 일지암을 포함해 초의 스님의 생가를 복원하고 다양한 공간들을 재현해놓은 곳이 지금의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이다. 옛 인연을 좇은 내 거처가 이곳이므로 나또한 아침마다 봉수산과 일지암이며 용호백로정에 올라 차 한잔 마신다. 대흥사의 풍경에 비하겠는가만 초의가 나서 자란 곳이니 때때로 난몰하는 연하가 어찌 비경을 이루지 않을 것이며 오룡산과 유달산의 석양이 어찌 빛나지 않을 것인가. 동국대 출판 <초의선백전>에 보면 나주 ‘삼양(三鄕)’에서 태어나 신기(新基)에서 살았다. 삼향지역은 군산봉수가 있는 곳으로 본래 나주 관할이다. 물길 따라 행정권역이 정해지는 전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출가한 지 3년째 당시 운흥사 관음전에서 수행하던 완호 스님을 만나 인연이 되었다. 대흥사에서 완호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고 초의라는 법명을 받게 되었다. 본래 그림 그리는 재주가 뛰어났던 모양이다. 대흥사를 중심으로 교우하게 되는 이른바 조선 후기의 문장가들, 화가들과 연결되면서 그의 재능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다량의 탱화들이 초의 작품이다. 초의선사는 한국 차문화를 중흥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근자 들어 차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초의에 대한 관심 또한 확산되었고 여기저기 대학에서 관련 학과나 전공들이 만들어지기까지 하였다. 초의에 관한 연구들도 쏟아져 나왔다. 이런 흐름을 굳이 따른 것은 아니지만 나는 지난해 출간한 졸저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다할미디어, 2021)에서 차선고도(茶船古道)를 제안한 바 있다. 그 책에 언급한 내용 일부를 오려 붙여 둔다.
무안군 삼향읍 왕산에서 출발하는 차선고도(茶船古道)
주지하듯이 차마고도(茶馬古道, Ancient Tea Route/ Southern Silk Road)는 비단길보다 먼저 생긴 무역로이다. 중국의 윈난성, 쓰촨성에서 시작된다. 티베트, 인도, 파키스탄 등지를 거쳐 실크로드로 이어진다. 위키사전의 설명을 빌리면, 마방(馬幇)이라 불리는 상인들이 말과 야크를 이용해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서로 사고팔기 위해 지나다닌 길이다. 차와 말만 사고팔았겠는가. 당연히 이곳을 통해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 졌음을 알 수 있다. 전성기에는 유럽까지 연결되기도 했다. 해발고도 4,000미터가 넘는 험준하고 가파른 길이지만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길로도 유명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2007년 KBS에서 6편으로 구성한 차마고도에 관한 다큐멘터리 <인사이트 아시아-차마고도> 제작부터이다. 나도 여러 차례 윈난지역을 방문하여 관련 정보들을 갈무리한 적이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무역로라고 추정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에 착안하여 나는 차선고도(茶船古道)를 제안하였다. 광의의 차선고도는 멀리 중국으로부터 뱃길을 통해 우리와 연결된 항로 혹은 차도(茶道)를 말하는 것이고, 협의의 차선고도는 초의선사의 생가인 현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에서 출발하여, 어린 나이에 출가한 나주의 운흥사로, 다시 평생을 보낸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까지 이어진다. 지금은 뱃길이 막혀있지만, 물골이 있던 때를 상상하여 이 루트를 재구성한다면 틀림없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세부적인 루트 구성이나 구체적인 실행계획은 기회를 봐서 밝히기로 한다.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 초의생가를 출발한 차선고도는 이윽고 중국으로 이어진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정민이 쓴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글항아리, 2018)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18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의 해금 정책이 풀리자 중국의 서남해안에서 북상하는 뱃길이 열렸다. 배를 통한 물류의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서남 연안에 중국 상선의 표착이 부쩍 늘어났다. 특별히 1760년 서해안에 표착한 중국 배에는 황차(黃茶)가 가득 실려있었다.” 1762년 11월 7일자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표류선 기사도 매우 흥미롭지만 지면상 생략한다. 사흘 뒤인 11월 12일자 『승정원일기』를 인용하며 중국 표류인들이 가져온 황차를 언급한다. 정민은 이렇게 얘기한다. “표류선 관련 기록에서 황차가 등장하는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고군산진에 표착한 절강 상인의 배에 황차엽이 대량으로 실려있었고 당시 금주령 상태에 있던 조선에서 이 황차는 제사 때 쓰는 제주(祭酒) 대신으로 각광을 받아 수요가 갑작스럽게 급증하게 되었던 사정이 짐작된다.” 이 시기 중국 남쪽 배들의 서남해안 표착이 상당히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금주령 하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황차가 특수를 누리면서 비로소 차의 존재가 조선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초의가 차를가까이하게 된 것도 이런 시대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민의 연구는 18세기 이후의 내력을 밝힌 것이지만 사실은 더 거슬러 올라갈수록 차선고도의 맥락은 더 깊어지지 않겠는가. 차선고도의 일부라도 둘러볼 차비를 꾸려봐야겠다.
남도인문학팁
차선고도(茶船古道)와 명선(茗禪)의 길
졸저에서 남도의 차와 이를 재구성할 차선고도에 대해 ‘고양(高揚)의 길’이라는 표제를 붙인 바 있다. 불교 중심으로 차 문화가 확장되었고, 스님들 중심으로 차 생활이 보편화된 것도 어찌 보면 스스로를 고양하는 첨단의 콘텐츠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차와 명상, 힐링, 수련, 영성 등의 조합을 이룬 다종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거론 되는 것이 추사가 남긴 명선(茗禪)이라는 글씨다. 추사가 초의에게 지어준 호이기도 하다. 시방 초의선사 생가에도 이 글씨를 걸어두었다. 대개 ‘차를 마시며 선정(禪定)에 든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문자 그대로 명(茗)은 차의 싹을 말하는 것이니 차를 마시며 선을 행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결론적으로 차는 명상이나 요가, 이른바 마음수련에 있어 최고의 콘텐츠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한 것들이라는 제호 아래 초의의 차를 맨 처음 거론한 것도 이런 고양의 뜻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장차 남도를 굽이굽이 돌아 중국에 이르고 현대적인 마방을 통해 유럽까지 이르는 차선고도 프로젝트를 실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