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우호선린과 침탈의 경계, 일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358. 조선통신사선의 출항
염치를 던져버린 이들을 대할 때는 실사구시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것이 조선통신사선의 복원 항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염치를 던져버린 이들을 대할 때는 실사구시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것이 조선통신사선의 복원 항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2023년 08월 10일(목) 12:53 |
212년만에 부산항에서 출항하는 복원 조선통신사선. 사진 홍순재 |
쓰시마 이즈하라항에 정박한 복원 조선통신사선-사진 홍순재 |
쓰시마 이즈하라항으로 들어서는 복원 조선통신사선-사진 홍순재 |
212년 만의 조선통신사선 출항, 선린(善隣)과 침탈의 경계
주지하듯이 통신사는 조선 국왕의 명을 받아 일본의 막부 장군에게 보낸 외교사절이다. 조선시대에 행하였으므로 조선통신사다. 개괄적인 정보는 지난 칼럼(6월 16일자)에 소개해두었다. 통신사의 교류가 우호선린의 상징이었지만 임진왜란 등 정세에 따라 변동을 겪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조선 사절의 일본 파견이 18회(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는 12회로 산정), 일본국왕사의 조선 파견이 71회에 달하였다. 일본이 조선에 파견한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다. 명칭이 일정하지 않은 것은 목적과 편성이 달랐다는 뜻이다. 회례사, 회례관, 보빙사, 경차관, 통신사, 통신관 등이 그것이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는데, 적을 알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했던 것일까? 나는 지난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 여기, 우리, 조선통신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 누군가에 의해 유행된 격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를 곱씹는다. 지난 일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경계의 다짐이 조선통신사를 상고하는 첫 번째 까닭일 것이다. 문제 삼는 것은 우호 교린의 상징이었고 수많은 학술, 사상, 기술, 예술 교류 등의 통로가 되었음에도 임진왜란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정세판단과 실기(失機)다. 일본이 정한론(征韓論)으로 치달은 이유야 수백 가지가 넘겠지만, 이에 대응한 견한론(遣韓論,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하지 않고 외교사절을 파견하여 평화적인 교섭을 하자던 주장)은 왜 확장되지 못했을까?” 그래서 다시 인용해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에 황윤길과 김성일이 통신사로 다녀와서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황윤길이 말했다.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 김성일이 말했다. “그러한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선조는 누구 말을 들었는가? 212년 만에 조선통신사선을 다시 띄웠다. 그동안 일제강점기도 겪었고 해방의 시기도 지나왔다. 조선통신사선은 장차 세토내해를 거쳐 옛 에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문제는 이런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일종의 성찰이다. 우호선린과 침탈의 경계에 서 있던 두 보고서 말이다. 시방 우리에게 닥친 정황을 조선통신사의 보고를 받았던 선조에게 견주어 본다. 윤석열 정부는 과연 일본에 대해 어떤 보고를 받고 있으며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을까? 임진왜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투기 문제가 첨예한 관심사로 떠올라 있다. 한미일 군사동맹도 더욱 강화하려는 모양이다. 시대가 변한 지금, 두 상반된 보고서를 이제는 모든 국민이 받아들고 있다. 비유하자면 윤석열 정부는 김성일의 보고를 받아들고 국민 대다수는 황윤길의 보고를 받아들고 있다. 박지원의 피렌체의 식탁(5월 27일자)에 의하면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여론이 85%에 달한다. 과학적 팩트를 떠나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고 있다. 황윤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앞에 ‘병화(兵禍)’가 있다. 아니 이미 깊어진 화병(病火)이 있다. 조선통신사선의 쓰시마섬 정박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윤석열 정부에게 질문한다. 우왕좌왕하다 나라를 혼돈에 빠트린 선조를 본받을 것인가. 불행을 반복하지 않도록 옛일을 깊이 살필 것인가.
남도인문학팁
조선통신사선의 복원 항해를 통해 성찰할 것들
한일간의 우호선린 관계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장 가까운 나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정 부분 역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구려, 백제의 이름으로 혹은 더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수많은 고대인을 전제하면 혈연적으로도 멀지 않은 나라다. 그러함에도 역사적으로 왜구나 임진왜란, 동학군 토벌, 일제강점기의 사례들을 보면 황윤길의 말처럼 우선 경계하고 예의주시함이 옳다. 저들의 무례함이 늘 도를 넘는다. 법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합리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도리를 무시해버리기 일쑤다. 방정맞고 예의 없는 동생을 보는 듯하다. 늘 크게 나무라는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우호선린의 미래를 닫아서는 안 된다. 마땅히 우리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일을 살펴야 한다. 그것이 외교의 기본 아니던가. 마침 한미일 정상회담이 열린다니, 후쿠시마 오염수 말고 제7광구 재협약 같은 선물을 가져오는 것은 어떤가. 비유하자면 일본 내에 견한론(遣韓論)자, 친한파 곧 결 고운 이들이 많다. 이들과의 교류와 협력을 대폭 늘려가야 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영역하면 “seeking truth from facts”이다.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이다. 사실(fact)에 토대는 두지만 정작 나아가야 할 방향은 진리(truth)라는 얘기다. 진리는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과학도 포괄한다. 사람의 마음과 꿈과 욕망도 모두 과학이다. 두루 보건대 알량한 지식이나 과학 등의 이름으로 사실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야말로 단견이다. 역사는 말할 것도 없이, 경제, 과학, 아니 인간의 삶 모두가 예외이지 않다. 염치를 던져버린 이들을 대할 때는 실사구시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것이 조선통신사선의 복원 항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