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여름엔 장쾌한 물소리, 가을엔 붉게 물든 단풍… 계절마다 절경
●구례 직전마을
역사 속 피로 물든 격전지 아닌
오곡의 하나인 피 많이 재배돼
‘피밭골’로 불리다 ‘피아골’로
30여 가구 산골주민 60여 명
산채·약초 따다 민박·식당 운영
역사 속 피로 물든 격전지 아닌
오곡의 하나인 피 많이 재배돼
‘피밭골’로 불리다 ‘피아골’로
30여 가구 산골주민 60여 명
산채·약초 따다 민박·식당 운영
2023년 07월 20일(목) 14:36 |
연곡사 북승탑. 국보로 지정돼 있다. |
직전마을 전경. 마을이 산중에 들어앉아 있다. |
피아골 풍경. 계곡물이 장쾌하게 흐른다. |
피아골의 위용. 직전마을로 흐르는 모습이다. |
피아골은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 지리산이 품고 있다. 임걸령에서 시작된 물이 지리산 골골을 거쳐 섬진강과 만난다. 장장 15㎞가 넘는 길고 깊은 계곡이다. 속을 헤아릴 수 없는 연못, 집채만한 바위와 어우러진 풍치도 빼어나다. 녹음 우거진 여름은 말할 것도 없고 봄과 가을?겨울 언제라도 좋은 골이다.
피아골은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예부터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잦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한말엔 의병들이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전후해선 국군과 빨치산의 교전이 치열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죽임을 당했다. 비극의 현장이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해 ‘피아골’로 불렸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이유다. 조정래도 소설 〈태백산맥〉에서 피아골 단풍을 역사의 비극과 연결 지어 묘사했다. ‘피아골 단풍이 핏빛으로 고운 것은, 옛날부터 그 골짜기에서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이 그렇게 피어난 것’이라고. ‘비탈에 일구어낸 다랑이논마저 바깥세상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굶어 죽은 원혼들이 그렇게 환생한 것’이라고 썼다.
지명 유래는 따로 있다. 피아골 연곡사에 많은 승려가 머물며 수행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식량이 부족한 절집에서 피(기장)를 많이 심었다. 피는 오곡의 하나다. 피를 심은 밭이 지천이어서 ‘피밭골’로 불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왓골, 피앗골을 거쳐 자연스레 ‘피아골’로 바뀌었다는 얘기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산간을 일구며 생명을 이어온 산골사람들의 애환이 오롯이 녹아있다.
산자락에 피밭마을이 있다. 한자로 피 직(稷), 밭 전(田)을 쓰는 직전마을이다. 직전마을은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속한다. 지리산의 남동부로 흐르는 피아골에 자리하고 있다. 피아골을 따라 내려오면 산 아래 첫 동네다. 섬진강변에서 올라가면 끄트머리에서 만나는 마지막 마을이다.
직전마을에서 길은 자연관찰로(임도)를 따라 표고막터로 이어진다. 계곡물은 왼편에서 흐른다. 물속은 버들치, 피라미, 다슬기들의 세상이다. 계곡을 품은 숲은 담비와 족제비, 어치와 물까치들의 놀이터다.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 나온 다람쥐도 보인다. 다양한 생물이 함께 사는 숲은 우리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산소를 공급해주고, 지하수를 내어주며, 홍수도 예방해준다.
길은 표고막터에서 등산로와 만나 삼홍소, 피아골삼거리로 올라간다. 피아골삼거리에서 노고단은 왼쪽, 임걸령과 반야봉은 오른쪽으로 간다.
직전마을에는 30여 가구 60여 명이 살고 있다. 척박한 산간을 일구며 살아온 산골사람들의 후손들이다. 주민들은 민박을 겸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산골에서 채취한 산채와 약초를 버무려 음식을 차려낸다. 마을이 민박촌이고, 식당촌이다.
마을사람들은 틈나는 대로 산에 오르내리며 산야초를 채취한다. 죽순을 수확하고, 벌을 키우며 벌꿀도 생산한다. 봄엔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고, 가을엔 산나무의 열매를 따기도 한다. 여름 휴가철은 가을 단풍철과 함께 마을이 가장 부산할 때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산골의 바람결도, 계곡의 물살도 덩달아 분주해진다.
장류와 장아찌를 담그는 젊은 아낙네들도 마을에 살고 있다. 언론에 심심찮게 나오는 김미선 씨 자매다. ‘피아골 미선씨’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태 자리로 돌아와 전통식품을 만들고 있다. 대한민국 6차산업 경진대회에서 대상도 받았다.
그가 청년들과 함께 만든 장류와 절임?발효식품은 유명 매장을 통해 팔린다. 온라인 마켓에서도 불티나게 나간다. 미국과 유럽 등 20여 개 나라에 수출도 한다. 계곡가에 늘어선 항아리 숫자와 가공공장의 크기가 그의 명성을 대변하고 있다.
마을 아래에 자리한 연곡사의 역사도 깊다. 544년, 백제 성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한때 지리산에서 가장 큰 절집이었다. 도선국사, 현각국사 등 많은 고승을 배출했다.
연곡사의 운명은 임진왜란 때 바뀌었다. 스님들이 의병으로 나서 맹위를 떨쳤다. ‘화엄사나 연곡사에 가서 주먹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온 연유다. 승병들의 활약은 그만큼 일본군한테 위협적이었다. 일본군이 불을 질러 절집을 모두 태워버렸다. 스님들의 의병 활동에 대한 보복이었다.
연곡사는 한말에도 일본군에 의해 불탔다. 항일의병의 근거지라는 이유였다. 고광순 의병부대가 연곡사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고광순은 ‘불원복(不遠復)’ 태극기의 주인공이다. ‘멀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그의 믿음이 묻어나는 글귀다. 주민들이 세운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가 연곡사에 세워져 있다. 현각선사탑비 옆 동백나무 아래다.
연곡사는 한국전쟁 때도 불에 타는 수난을 겪었다. 전각이 모두 사라지고, 석조물만 남았다. 석조물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돼 있다. 동쪽과 북쪽에 있는 승탑, 동승탑과 북승탑이 국보다. 삼층석탑과 현각선사탑비, 동승탑비, 소요대사탑은 보물로 지정됐다. 화엄사?쌍계사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어엿한 조계종의 교구 본사인 연곡사다.
절집은 1980년대에 새로 짓기 시작했다. 중창불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피아골 순국 위령비도 세워졌다. 다른 절집에 비해 고즈넉한 멋은 덜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큰 역할을 했던 연곡사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