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발산미륵과 쥐엄나무는 뭍과 물 연결하는 이정표”
발산(鉢山)미륵과 주엽나무
“미륵할매는 초기의 입석 형태를 띠고 있는데, 미륵할아버지는 조각된 형태여서 주목된다. 자연 입석을 형상화시킨 신앙물에서 차츰 성기 모양의 입석 형태의 상징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미륵할매는 초기의 입석 형태를 띠고 있는데, 미륵할아버지는 조각된 형태여서 주목된다. 자연 입석을 형상화시킨 신앙물에서 차츰 성기 모양의 입석 형태의 상징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2023년 03월 09일(목) 13:49 |
지난 2월5일(음력1월15일) 무안 해제읍 발산마을 미륵당제. 이윤선 촬영 |
무안 해제 발산마을 당산나무. 이윤선 촬영 |
무안 해제 발산마을 미륵당할머니. 이윤선 촬영 |
무안 해제 발산마을 미륵당할아버지. 이윤선 촬영 |
‘바랑’과 ‘바리때’의 발산(鉢山)
승려의 밥그릇을 말하는 ‘바리때’와 짊어지고 다니는 배낭 즉 ‘바랑’의 원말 ‘발낭(鉢囊)’에서 발(鉢)이라는 이름이 왔다. 마을 북쪽 언덕을 비석거리라 한다. 영광군수 이현익 휼민선정비(1865년)가 세워져 있다. 영광에서 지도군(지금의 신안군 지도읍)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길을 지나가야 한다. 솔갯재의 비석거리를 넘어 독새청이라는 곳에 주막이 있었다. 오랫동안 대로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발산마을미륵당산’ 항목을 기술한 전남대 교수 표인주는 이렇게 말한다. “충남 천안 살던 밀양 박씨가 잦은 흉년으로 살기 어려워지자 1680년쯤에 좋은 곳을 찾아 내려오다가 발산마을에 이르렀다. 앞에는 바다가 인접해 있고 지세가 좋아 500년 이상을 안주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해 정착하게 되었다. 마을이 이뤄질 당시에는 ‘서당골’, ‘비석거리’ 등으로 부르다가 마을 앞 절의 스님이 들고 다니던 바리때 모양으로 마을이 생겼다 해서 뒷산의 ‘산’을 합해 ‘발산(鉢山)’이라 하였다.” 마을 앞 절은 건너편 강산(糠山)에 있는 원갑사(圓甲寺)를 말한다. 통일신라의 의상이 창건했다. 본래 강산사였으나 훗날 당산사로, 다시 원갑사로 바꾸었다. 사찰에 빈대가 너무 끓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하나, 진위는 확실치 않다. 삼갑사(영암 도갑사, 영광 불갑사, 무안 원갑사)중 하나라는 점에서 의미를 두기도 한다. 발산마을 미륵은 원갑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이 참조되었는지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로 지정되었다.
바다와 내륙의 교접지에 세워진 미륵 한 쌍
발산마을 미륵은 두 기이다. 미륵당할아버지는 마을 앞 농로에 세워져 있다. 미륵당할머니는 약 200미터 건너편 농로에 세워져 있다. 할아버지미륵은 높이 187cm, 둘레 110cm이다. 벙거지를 쓰고 턱에서 가슴까지 긴 수염을 늘어뜨렸다. 길쭉한 얼굴상은 거친 돌입자와 심한 마모 때문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귀가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전국에 분포한 미륵보살 형태이다. 한때는 담쟁이나 마삭 종류의 덩굴이 할아버지미륵을 감싸고 있었다고 한다. 덩굴이 왕성하면 그해 풍년이 들고 세가 약하면 흉년이 든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두 기 모두 경지정리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본래의 자리는 마을의 입구 양쪽이었다. 할머니미륵은 자연석이다. 미륵(彌勒)은 도솔천이라는 곳에서 살며 56억 7천만 년 후에 메시아로 출현해 중생을 제도한다는 미래불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해있는 불교사상이자 민간신앙의 일종이다. 사찰 인근 마을에서 자연암석이나 불상으로 조각한 형태로 모셔진다. 사찰과는 전혀 관련 없는 당산제나 당제 등으로 불리는 마을제의의 신앙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선돌(立石), 장승(長栍), 이정(里程), 솟대, 짐대, 벅수나 법수(法首), 후(堠, 봉화대) 혹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등으로 분화되고 습합되는 과정이 복잡하기에 설명하기 쉽지 않다. 학자마다 조금씩 다른 주장을 한다. 민간신앙으로서의 개념과 형태가 분화되고 중첩되는 과정을 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회가 되면 남도지역만이라도 건별, 지역별로 대별하여 소개하겠다. 발산미륵 문화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미륵할매는 초기의 입석 형태를 띠고 있는데, 미륵할아버지는 조각된 형태여서 주목된다. 자연 입석을 형상화시킨 신앙물에서 차츰 성기 모양의 입석 형태의 상징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용어사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용에는 동의한다. 여수지역에 산재한 벅수와 더불어 뭍과 물을 연결하는 이정표 기능을 했다는 점을 주목한다.
남도인문학팁
발산미륵과 쥐엄나무는 뭍과 물을 연결하는 상징 아니었을까?
발산마을 입구에 서 있는 당산나무는 주엽나무다. 높이 20여 미터 폭이 3m 10cm 정도로 우람하다. 전국적으로는 쥐엄나무, 뒤엄나무, 조협나무, 조각자나무 등으로 불린다는데 동일 수종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흔히 쥐엄나무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상록수 쥐엄나무와는 다른 활엽수다. 까막가시나무라고도 한다. 발산마을 쥐엄나무는 가시 없다. 아마도 민주엽나무에 속할 것이다. 본래 가시가 있다가 수백 년 수령이 되면 가시가 사라지는지, 혹시 다른 수종인지 전문가들의 질정을 기대한다. 충남 부여 남면 삼용리, 수백 년 수령의 주엽나무가 천연기념물 지정 대상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흔치 않으니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간척 전에는 본래 당산나무 앞까지 바다였으므로 이곳이 일종의 포구이자 배머리였다. 쥐엄나무에 배를 매었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왔다. 지도군이나 서남해 도서, 더 멀리는 중국에 이를 수 있는 포구였을 것이다. 통일신라 혹은 백제 시기부터 이곳이 대로변이었으므로 지금의 영광지역에서 지도군 등의 도서해안지역으로 나가는 나루였다. 미륵당산도 이 나루 언저리에 있었을 것이다. 원갑사의 본래 규모를 전제해본다면 사찰과 관련된 돌벅수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는 바다에 출입하는 이정(里程)의 표식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내가 아직 추적해보지 못했지만, 법성포의 불두(佛頭)설화나 서남해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돌배(石船)설화 등의 해안표착설화와 관련 있는지도 관심 대상이다. 인근의 승달산 목우암 설화에 대해서 본 칼럼에 다루었으므로 참고 가능하다. 이런 설화들이 인도나 중국, 일본 등과의 네트워크 정보를 담고 있다. 쥐엄나무를 당산나무로 모시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점도 특별하다. 순천대 총장을 역임했던 고 최덕원이 남도지역 249개 자연마을의 당산나무를 연구한 바 있다(남도의 민속문화 참고). 가장 많은 것이 귀목(269주), 팽나무(109주), 소나무(41주) 등이고 쥐엄나무(10주)는 흔치 않다. 차제에 무안군 향토문화유산으로라도 지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선 후기 문장가 유한준(1732~1811)이 말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며, 보면 쌓아두게 되니 그저 쌓아두는 게 아니다.” 유홍준이 이를 멋지게 풀어 쓴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 사랑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인다.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