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창·김명희> 공생과 공존의 교육
김명희 아동문학가
2023년 02월 19일(일) 14:07
김명희 아동문학가
어느 날, 시골에 살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가 찾아 와 말했다. 큰아이는 올해 4학년이고 작은 아이는 3학년인데, 3학년이 되면서 영어 과목을 배우게 되는데 영어 독해가 잘 되지 않는다면서 한숨 섞인 하소연을 이어갔다. 아이들이 시험점수를 20점을 받았는데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걱정은 산처럼 커져갔다.

“남들 아이들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영어 학원을 보내는 둥 야단법석인데 이렇게 만날 놓아먹여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 엄마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면서 스스로를 깊이 자책했다. 시골에서 사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서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고민 고민 끝에 애들 아빠한테 의논하여 서울은 못 갈망정 소도시라도 가서 아이들을 교육시켜야 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남편은 그대로 묵살하더란다. 초등학교 다닐 때 놀지 못하면 언제 놀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 또 그런 것 같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 아이들 따라가려면 마냥 시골에서 공부시키는 것이 옳은 일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단다.

옛날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 교육을 위해 공동묘지 부근에서 시장 옆으로, 다시 학교 아래로 세 번이나 이사했다. 이 맹자의 “맹모삼천지교”는 환경이 자녀 교육에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해 주는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나, 맹모가 세 번씩 옮기는 과정에는 단순한 이사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교육 철학이 들어 있다. 교육은 철학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지 욕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자’의 시에 “하나를 심어 백을 수확하는 것이 사람이니라.” 했다. 그러려면 교육이 철학이 되어야 하고 인적 자원을 키우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자식 교육이 참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룻밤 자고 나면 바꿔져 있는 세상 속에서 요즘 아이들이 성장 되고 있으니 부모로선 감당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그뿐이 아니다. 부모들은 아이들보다도 세상 적응 속도가 훨씬 느린 세대가 되고 말았다.

어른들은 과거의 속도로 살고, 아이들은 미래의 속도로 생활한다, 세대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벽이 된 채 각자도생이 돼버린 세상이다.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아니라 너는 네 식으로 나는 내 방식으로 살고 있다. 사람이 하나를 심어 백을 얻을 수 있으려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공생 교육이 훨씬 효과적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존적 삶의 가치를 운운했다. 공존이라 하면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하는 것이고, 공생은 서로 도우며 함께 산다는 의미이다. 얼핏 보면 같은 뜻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커다란 차이가 숨어 있다. 공존은 인정해 주는 일이고, 공생은 사는 일. 살아 있는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서로를 인정해 주는 공존과 사는 일을 함께 도와가면서 살아 있는 현상을 말하는 공생. 지금은 공생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다.

갈수록 사람 향기를 잃어가는 삭막한 세상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배우는 교육이 그리운 시대다. 우리 교육도 AI, 메타버스, 로봇 교육이 성큼 다가와 있다. 머지않아 교과서도 교사도 없는 교육이 등장할지 모른다. 벌써부터 쳇 GPT에서 모든 글쓰기가 되는 세상이니 말이다. “지수에게 보내는 편지” 하고 클릭했더니 구구절절 편지가 도착했다.

모든 일을 로봇에게 빼앗기고 나면 “인간이 설 땅이 어디 있을까?”가 고민이 된다. 인간이 발명한 로봇시대에 함께 공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 앞에 시골에서 찾아온 학부모의 고민이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