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94>“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지독하게 사색할 것 같은 곳”
오키나와를 읽다 ①나하 시
2023년 01월 26일(목) 16:20
기내에서 바라본 오키나와. 아름다운 바다 빛깔이 인상적이었다.
오키나와 전쟁 사진
공항에서 타고 왔던 모노레일
나하 시 뒷골목 밤 풍경
나하 시 국제거리 밤 풍경
나하 시 낮 풍경
일일 버스 티켓(2,500엔)
오키나와전쟁은 1945년 6월 23일에 종식되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년 3월말부터 6월 23일까지 3개월 남짓 전투에서 전사자만 20여만 명에 달했다. 일본은 본토 사수의 마지막 거점으로 오키나와를 방어했고, 미국은 일본 본토 공격의 교두보로 오키나와를 점령하려고 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그리 녹록하지 않은 듯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 조그마한 섬에서 1만 명 이상을 잃었다. 본토에서 옥쇄투쟁을 벌일 경우 수십만, 수백만의 자국민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공포를 미국은 느꼈다. 그 공포는 오키나와에서 태평양 전쟁의 지상전을 끝내게 했다. 결국 본토 결전은 없었다.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원자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점령한 다음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8월 15일 일본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태평양전쟁은 그렇게 해서 종전을 고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7만 7,166명이었다. 미국군 측 희생도 컸다. 미군은 1만 4,009명이 전사하고, 영국군도 82명이었다. 한국인도 1만 명가량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그중에는 조선에서 온 위안부도 있었다.

하지만 81일 간 전개된 그 전쟁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참화를 당한 것은 오키나와 원주민이었다. 원주민의 희생자 수는 무려 14만 9,193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양측 국가 군인들의 전사자들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원주민들은 전투에 투입되고 노동에도 혹사당했다. 전투가 벌어지자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전선으로 끌고 다니며 총알받이로 이용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범죄는 원주민들에게 내려진 집단 자살령이었다. 수많은 주민들이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서 자살을 했고, 집단 자살을 택하지 않은 주민에게는 군대가 수류탄을 던져 학살했다(모 책에서는 군인들이 먹을 식량이 부족해서 원주민을 희생시켰다고도 했다).

1945년 3월 26일 6월 21일 사이에 집단사망이 기록된 지역이 30곳이 넘었다. 미국 공격 당시 오키나와에는 30만 명의 주민들이 있었는데 전투 중에 3분의 1이 넘는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 오키나와를 처음 소개하면서 전쟁으로 먼저 서문을 연 것은 내가 오키나와를 처음 접한 것이 오래전 자살령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자살령을 피하기 위해서 어느 마을에서는 중학교 교사 한 명에게 학생들을 딸려 보내서 미리 본토로 피신시킨다. 시간이 흘러 본토 사람이 된 그때의 선생이 다시 오키나와를 찾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사 중간 중간 바람이 불 때마다 금단의 언덕에서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어느 한 맺힌 사람의 곡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들린다. 결국은 오묘한 각도로 세워진 잘 마른 해골 속으로 통과한 바람이 내는 소리였다. 그때는 그 부분을 무심하게 읽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소리는 일상 속에서 바람이 뒤챌 때마다 해골에 걸러진 누군가의 곡소리가 되어 내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비참한 전쟁의 참화를 한 꺼풀도 아니고 두 꺼풀 세 꺼풀 정화되고 객관화된 글쓰기인 오키나와 문학선집에서 먼저 만났다. 하지만 그 이미지와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생생해져서 오키나와를 직접 가봐야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했다. 막연한 머릿속 이미지와 직접 그 땅을 밟으면서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과의 괴리감을 찾아보는 작업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해서 2022년 12월 29일 인천공항에서 인천에서 10시 10분 비행기를 타고 2시 30분 오키나와 나하 공항에 도착했다. 숙소는 나하 시에 있는 국제시장 근처로 정했다. 공항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숙소가 있는 번화가 전차 정거장에 도착했다. 블록바닥을 캐리어를 끌고 10분 정도 가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하에서 3일을 머무르고 1월 1일에 나고 시로 향할 계획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나고 시는 평화롭고 한적했다. 듬성듬성 가로수로 심어진 야자수 나무가 큰 키를 자랑했다. 도로 위에는 차량이 많지 않았다. 70여 년 전, 전쟁에서 원주민 3분의 1이 희생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전차 정거장에서 5분 정도 걸어가자 상가 거리가 나왔다. 옷 매장과 식당 등이 2차선 도로 양쪽으로 즐비했지만 화려함이나 북적함과는 달리 어떤 적막함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팬데믹 여파로 아직 관광객이 많지 않아서일까.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나는 늦은 점심 식사를 이자카야에서 시원한 생맥주와 안주로 요기하고는 해가 지기 전에 바다를 봐야한다는 명분으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나미노우에 해수욕장 가서야 그 적막함이 내게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나미노우의 투명한 바닷물이 깨끗한 백사장을 적시는 것을 보고 있을 때 마침 한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졌는데 그때 나는 오키나와가 버림받은 사람이 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위로의 공간이기 보다는 버림받았다는 그 느낌을 지독하게 사색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최적화된 장소 같은 곳 같아서였다. 무거운 머리를 이고 숙소로 되돌아오는 발걸음은 의외로 가벼웠다. 해가 기울자 거리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초로한 낮과 달리 낡은 건물이 화려한 네온사인 속으로 숨었다.

잠결에는 사이렌 소리를 두 번 들었다. 사고가 난 것인지, 아니면 전쟁이 난 것인지, 비몽사몽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았고 다시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 와 있었다. 보슬보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편집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