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국가 위난 때 마다 마지막 보루는 '타인능해 정신'
명가의 조건, 구례 운조루||우리는 홀로인 것이 아니라||서로 기대어 존재한다는 사실||전통시대 풍수적 관념을 넘어||구례 운조루를 다시 볼 것은||나눔의 마음을 배양하고||전통의 힘을 나누어 갖는||문화적 길지라는 점에 있다
2022년 12월 01일(목) 15:52
구례 운조루 솟을대문. 이윤선

선녀는 하늘에서 베를 짠다. 연오랑의 짝꿍 세오녀가 그랬고 견우의 짝꿍 직녀도 그랬다. 오죽하면 이름을 직녀(織女) 곧 베를 짜는 여자라고 했을까.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 금가락지를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다. 구름 위에 노닐기가 무료하면 가끔 땅으로 내려와 놀다 떨어뜨리기도 한다. 지리산 노고단의 옥녀도 그리했다 하니 전국의 수많은 옥녀봉은 선녀들이 내려와 좌정한 바위일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뜨린 것인지 노고단 형제봉에서 떨어뜨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을 금환락지(金環落地)라 한다. 산과 연못이 둘러싼 땅, 남한의 3대 길지라는 구례의 오미마을 얘기다. 지리산의 문수골 계곡과 평야지대가 만나는 지점이어서 농사짓기 좋은 땅이다. 이 마을에 선녀가 떨어뜨린 가락지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택 운조루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하지 않다면 어찌 구름 위에 노닐던 새, 곧 운조(雲鳥)의 이름을 붙였겠는가.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고 해석한다. 안개 자욱한 날 먼발치에서 보면 마치 운조루 고택과 마을이 구름 속을 유영하는 듯하다. 지상의 어떤 새가 이리 아름답겠는가.

조선 중기인 1776년(영조 52년)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은 집이다. 총 55칸의 고품격 한옥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었다. ㅁ자 형태는 남도 지역에서 보기 힘든 구조인데, 중북부 지방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한다. 사랑채 서쪽에 있는 누마루를 '운조루'라 한다. 이것이 집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운조가 상징하는 의미가 이 집에서 가장 크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은 안채를 전면 보수하는 중이라 접근에 제한이 있다. 완성된 이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구례 운조루 손모내기 체험마당. 이윤선

타인능해(他人能解)의 쌀뒤주, 씨압소의 씨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에 타인능해라 쓰여진 쌀뒤주가 있다.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이 독에 쌀을 채워놓는 것은,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이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 마개를 돌리고 쌀을 빼가도록 배려한 것이다. 현재는 모형을 마련해두고, 본래의 것은 집 아래 마련된 유물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항간에 이런 얘기들이 있다. 만약 이런 나눔이 없었더라면 각종 민란 등 힘든 시기에 운조루가 온전 했겠는가라고. 대체로 그러했을 것이다. 엄혹하고 곤핍했던 시절, 이념으로 갈라서고 계급으로 갈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창과 칼을 들이대지 않았던가. 운조루의 보존과 지속 가능했던 권위의 이면에 타인능해의 마음이 있었다는 점 거듭하여 주목한다.

지난해 설날 즈음에 본 지면에 다루었던 씨압소(배냇소를 남도지역에서 주로 부르는 이름)의 전통도 운조루의 쌀뒤주에 비견하여 얘기할 만한 사례다. 한 아이가 태어나 열네 살이 되면 씨압소를 키울 수 있는 나이가 된다. 무상으로 분배받은 송아지는 생후 6개월이 되면 '목매기' 즉 목에 고삐걸이를 한다. 이후 뿔이 나오고 생후 1년여 후에 코뚜레를 뚫어 채운다. 생후 13개월 정도 되면 새끼를 밴다. 임신 기간이 280일로 사람과 거의 같으므로 생후 2년이면 새끼를 분만하게 된다. 통상 이 새끼를 씨압소 받아 기른 소년이 갖고 어미소는 씨압소를 분배해준 부잣집에 갚는 구조다. 따라서 소년이 16세가 되면 자기의 소를 갖게 되는 것이고, 혼인할 수 있는 자격이랄까 성년으로의 도약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 절대적인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던 시절에는 이 씨압소 분배 구조가 통과의례와도 같은 중요한 일이었다. 아무리 가난하게 태어났더라도 혼인할 나이가 되면 소 한 마리를 소유할 수 있는 '씨드머니'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배냇소 정책'이라 이름하고 나랏일을 맡아 하는 이들에게 공식적인 정책으로 실천해보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일종의 청년창업자금이다. 성년에 진입하는 아이들에게 무상 분배되는 씨압소 전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 칼럼으로 다룬 부루단지도 마치 이와 같은 것이다. 부루단지의 다른 이름이 제석오가리, 성주단지 등 씨앗자루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선조들은 이 씨앗을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전쟁이 나면 다른 것은 다 버려도 종지기나 단지에 담아 보관하고 있던 씨앗을 복부에 차고 피난길에 오르지 않았던가. 나라가 위난에 처하는 것은 시대마다 양상이 다를 것이지만, 식량이 없어 배곯아 죽는 시대에 가장 소중했던 것은 쌀로 상징되는 먹거리였다. 씨압소의 전통이 그러한 것처럼 다음 해에 농사를 지을 씨앗을 남겨야 하고, 논밭갈이를 할 소를 보전해야 했다. 현대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세월호와 이태원참사에서 확인했던 것들이 있다. 긴급한 위난이 생겨 피난길 오를 때에 복부에 찰 마지막의 부루단지, 생명보다 더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 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타인능해의 정신, 우리가 홀로인 것이 아니라 서로 기대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전통시대의 풍수적 관념을 넘어 구례 운조루를 다시 볼 것은 이 나눔의 마음을 배양하고 전통의 힘을 나누어 갖는 문화적 길지라는 점에 있다. 선녀들이 일부러 반지를 떨어뜨려 금환락지의 길지를 만들었던 것은 이런 마음을 배양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구례 운조로 유물전시관에 전시된 타인능해 쌀뒤주. 이윤선

남도인문학팁

상속된 노블레스 오블리주, 쌀뒤주에서 문화뒤주로

지난여름 본 칼럼을 통해 남원의 몽심재(夢心齋)를 소개하며 명가의 조건을 얘기한 적이 있다. 어쩌면 종가의 조건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같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거나 표방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개 양반가 특히 잘 나가던 양반가는 수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베짱이처럼 살았을 것이라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한군데 묶어 말하기 어렵다. 대쪽같은 기개로 국난에 대응하고 무엇보다 지역의 어른으로 존경받았던 많은 이들이 있다. 왜란에 의병을 일으키거나 종교적 선행을 일삼거나 위난에 적절하게 대응했던 사례들을 우리는 수도 없이 보고 들었다. 이런 선한 기운들이 있었기에 왕실이나 기득권들의 권한 남용에도 나라가 반 천년씩 존재해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조용헌은 몽심재에서 1년 동안 네트워크용으로 사용했던 쌀이 3천 가마라고 분석했다. 600가구 3천 6백 명이 1년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양이라나. 또 헛간에 테두리가 올라있는 멍석을 펴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을 나누었다고 전한다. 운조루의 타인능해 쌀뒤주와 어쩌면 이리도 닮았을까. 타인능해의 쌀뒤주에 담아두었던 쌀의 양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몽심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두곳 모두 지리산의 품에 들어 있으니 어쩌면 지리산 형제봉의 옥녀가 일부러 금반지를 떨어뜨려 선한 기운을 펼쳤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쌀뒤주를 전략적인 선행이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은 타인능해의 정신이 아주 오래도록 지속 되어 왔기 때문이다. 전통시대의 운조루 뒤주가 가난한 이들에게 곡식을 나누는 쌀자루였다면 현재는 각종 프로그램을 통하여 이타 정신과 전통의 힘을 나누는 문화자루가 되었다고나 할까. 지난 몇년간 운조루에서 행한 프로그램들을 보면, 쌀뒤주에서 착안한 어린이들의 손 모내기로부터 수확에 이르는 참여운동, 운조루 서당, 인문학당 및 종가 소유 뒷산까지 연계한 체험활동 등이 두드러진다. 상생과 상상, 시방과 변방, 생명의 논 등 내건 화두가 지향하는 바가 있다. 풍수적 명당이라고 영원히 이어지는 게 아니다. 지속 가능한 길지가 되는 조건은, 생명의 기운, 함께 하는 에너지를 널리 공유하는 것이다. 다시 상고하건대 무엇을 일러 종가라 하고 명가라 하며 혹은 명문이라 이르는가. 지리산 골골이 짙은 숲들을 지나 남원 견두산 자락의 단아한 고택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감상을 받았듯 또 한 자락 오미마을 운조루에서 더불어 살아갈 영감을 얻는다.

구례 운조로 나무 오르기 체험 마당. 이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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