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0일(목) 16:11 |

지난 8일 광주 동구 소태역 2번출구에서 한 노인이 손잡이를 잡은 채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다. 정성현 기자·그래픽 최홍은
우회전 일시 멈춤 등 최근 잇따른 교통 관련법 제·개정의 추세는 '보행자 중심'이다. 이에 전국 각 지자체들은 보행자가 안전하고 편리하게 걸을 수 있도록 쾌적한 보행환경 조성에 힘을 쏟고 있다.
광주·전남 또한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조례'를 제정, 노인·임산부·어린이·장애인 등 보행이 불편한 사람이 차별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시행 중이다.
이런 지자체의 노력에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광주·전남은 '걷기 불편한 지역'이라는 하소연이 나오곤 한다. 11일 보행자의 날을 맞아, 보행 불편자 비율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심층적으로 들어봤다.
●"교통약자 시설 의미 떨어져"
"역에서 내려도 한참 걸어와야 한다니께. 힘들어 죽겄어. 집은 여긴디 엘리베이터가 저렇게 멀리 있으믄 누가 탄다요. 무용지물이라니께."
지난 8일 소태역 광주1호선에서 만난 이경자(66)씨는 한 발 한 발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며 연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장을 보러 가는 등의 볼일을 위해 일주일에 3번 이상 이 곳을 이용한다고 했다.
이씨에 따르면, 소태역은 장애인·노인 등 교통약자에게 꽤나 불친절한 곳이다. 해당 역사는 총 4개의 출구가 있는데, 교통약자를 위한 엘리베이터는 1번 출구에 설치돼 있다. 그러나 1번 출구와 2·3번 출구의 사이가 250m가량 떨어져 있어, 실제 다른 출구가 목적지인 이용객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도 한참을 걸어야 한다. 역사 밖으로 가기 위한 에스컬레이터 등 다른 편의 시설은 없다.
문제는 지상에서 출구와 출구를 오가는 사이에 다수의 차량이 지나다니는 등 교통약자가 걷기에는 위험한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내부 계단을 통해 이동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2020 노인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노인들은 외출 시 가장 불편한 점으로 계단 오르내리기(25%)와 버스·전철 이용(19%)을 꼽았다. 이들에게 대중교통은 편리함보다 불편함이 더 크다는 뜻이다.
이씨는 "노인들은 지하철 이용이 무료라 굉장히 자주 이용한다. 그런데 보행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팡이 짚고 다니는 어르신들조차 어쩔 수 없이 힘겹게 통행하고 있다"며 "이 역사뿐만 아니라 다른 곳들도 비슷한 상황인 데가 많다. 이용객 조사 등을 거쳐 각 지역에 맞는 통행 개선들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지난 8일 오후 광주 동구 학동사거리에서 한 노인이 횡단보도를 건넌 후 수레에 짐을 옮기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정성현 기자

지난 8일 광주 서구 돌고개역에 설치된 엘레베이터에 탑승객이 몰려, 한 노인이 타지 못한 채 지켜 보고 있다. 정성현 기자
● 노인들에게 위험한 횡단보도
같은 날 찾은 광주 동구 학동의 한 왕복 6차로 횡단보도.
인근에서 작은 수레를 끌며 박스를 수집하던 윤모(75)씨는 작업을 마치고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는 휴대전화 등을 하는 다른 보행자들과는 달리, '언제 신호가 바뀔까' 온 정신을 신호등에 집중했다. 그리고 녹색등이 점등되자 기다렸다는 듯 힘껏 수레를 밀었다.
처음에는 제법 속도가 나는 듯 보였지만, 수레는 절반도 채 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힘에 부친 윤씨는 눈앞에서 줄어드는 숫자가 야속한지 '어휴' 한숨을 쉬고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때는 이미 녹색불의 신호가 10여 초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윤씨는 점등이 빨갛게 바뀌고 2초 가량이 더 지난 후에야 도로를 완전히 건널 수 있었다. 갓길에 세워 둔 큰 수레에 짐을 옮긴 윤씨는 그제야 놀란 몸과 가슴을 진정시키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광주경찰에 따르면, 횡단보도의 녹색 점등 시간은 일반 성인이 1초에 1m를 이동한다고 가정하고 설계됐다. 그러나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가 '만 65세 이상 노인들의 건강 상태'를 연구한 결과, 노인의 평균 보행 속도는 1초에 약 0.7m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횡단보도 초록 점등 시간은 노인들에게 상당히 짧다는 의미다.
윤씨는 "횡단보도를 하루에 두어 번 건너는데, 그때마다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 신호가 1초 줄어들 때마다 속이 타고 오싹해진다"며 "아무리 빨리 걸어도 신호에 맞게 건널 수가 없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나보다 더 느리기도 하다. (신호가) 조금이라도 더 여유로워졌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밝혔다.

지난 7일 찾은 광주 동구 한 횡단보도에서 노인이 잰걸음으로 도로를 건너고 있다. 정성현 기자
전문가들은 더욱 가속화되는 고령화에 따라, 보행 약자 계층 등을 고려한 정책·시설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선녀 호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고령이 된 노인들은 보행 장애를 겪을 확률이 높다. 이는 매일 지속되는 불편함이 많아진다는 뜻"이라며 "대안으로 어르신들의 통행이 잦은 곳이나 최근 보행 중 교통사고가 발생한 곳을 조사해, 횡단보도 대기 쉼터·에스컬레이터 등 보행 안전·편의시설을 설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광주시 관계자는 "지하철 엘리베이터·보행 도로 등 노인들이 불편함을 겪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알고 있다"며 "현재 이를 중장기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보행환경 기본 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 이르면 내년께부터 (보행환경 개선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광주경찰 교통과 관계자는 횡단보도 점등 시간 등에 대해 "필요에 따라 1·2초 정도 더 시간을 늘릴 수 있다"면서도 "교통량이 많은 도로에서 녹색등 시간을 늘리면 교통체증을 야기할 수 있기에, 도로교통공단 등 기관·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