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88> 보안관 호위 받으며 등교 흑윈 민권운동 상징 그림
뉴욕, 뉴욕, 뉴욕 노먼 록웰(Norman Rockwell) 박물관
2022년 11월 03일(목) 16:14

록웰이 그린 인근 마을 그림.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아시아인에 대한 미국의 제노포비아는 중국인 이민자들이 처음 미국에 도착한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흑인 노예를 대체할 값싼 노동력으로 유입된 이들은 나중에는 금광에서 금을 캐는 일을 했다. 미국 백인들은 이 중국인 노동자들이 백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생각해 위협으로 여겼다. 중국인을 역병, 해충이라고 부르며 비하했다. 결국 1882년 연방정부는 중국인의 미국 이민을 금지하는 중국인 배척법을 통과시켰으며, 나중에는 아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이민을 금지시켰다. 이민금지법을 폐지하는 '1965년 이민국적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유럽 백인이민자들만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이민 온 아시아인들은 여전히 인종차별의 희생자로 살아야 했다. 그런 미국이 1965년 아시아인뿐만 아니라 중남미, 아프리카 이민자들에게 문을 열었다. 흑인 민권 운동 덕이었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자체적인 운동을 개시해 공평한 처우와 존중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 또한 1960년대 말에 블랙파워 운동에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캐시박홍은 그녀의 책 『마이너 필링스』에서 말한다. 그렇지만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는 오늘날 미국 한인 사회와 한국에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알게 모르게 국제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 여성 등을 또 다른 차별의 대상으로 위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록웰 박물관

다소 서론이 길었지만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사람(박물관)은 가장 미국적인, 백인 중산층 일상을 섬세하게 삽화로 그려냈던, 미국 회화사의 대표적 민화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노먼 록웰(Norman Rockwell, 1894~1978)이다.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1969년 매사추세스 주(州) 스톡브리지에 노먼 록웰 박물관이 생긴다. 미술작품 574점을 비롯해 작업 사진과 팬레터, 사업 문서 등 10만 건이 넘는 록웰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다.

뉴욕 주의 수도인 올버니(Albany)에서 2주간 머물렀던 내가 꼭 방문해야 했던 곳이기도 했다. 학창시절부터 성탄절이나 엽서 등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삽화를 직접 그린, 그가 살았던 곳을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흑인학생 백인학교로 첫 등교하기

그는 일찍이 재능을 보였다. 열네 살 때부터 뉴욕에 있는 여러 미술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여전히 학생이었던 열여섯 살에 성탄절카드를 만들어달라는 생애 최초의 주문을 받고 열여덟 살 때부터 본격적인 전업 화가의 길을 걷는다. 4년 후, 미국 최대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주간지인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표지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 후 47년간 그 잡지에 총 321점의 표지 그림을 그렸다. 그는 역사상 당대에 가장 많은 팬을 가진 미술가가 된 것이다.

미니바에 걸린 가출한 꼬마 그림. 노먼 록웰 그림.

그의 그림은 익살스러우면서도 따뜻하다. 인물 각각의 표정 및 움직임이 살아있다. 우리 주위에 있을 법한 인물이어서 친근하기까지 하다. 심지어 장난꾸러기 남자 아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서조차 따뜻함이 엿보인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부럽게 본 것은 '가출한 꼬마 아이'라고 해도 인격을 존중하는 어른들의 태도이다. 어떻게 하면 이들의 동심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배려해야할 지 등의 고민이 자연스럽게 어른들의 표정에 스며있다. 한국과의 문화 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는 작가의 천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가 포용적인 환경이었다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는 백인 중산층 환경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그가 말년에 거주했던(박물관 자리) 마을 또한 하얀색 박공지붕과 숲이 어우러진 한적한 중산층 교외지역이었다. 그의 정서 및 화풍은 그 당시 미국 주류 사회 구성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코드였다. 가장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소재 대상은 주류 사회 구성원 및 환경으로 제한되었다. 비주류 사회 구성원들이 끼어들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가 위대한 것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그의 시선은 사회의 그늘에 초점에 맞추기 시작한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작품 중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림 중 한 점이 1960년 루이지애나에 살던 6세 흑인 소녀 루비 브리지스가 백인들만 다니던 초등학교에 보안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등교하는 역사적 장면을 그린 그림일 것이다.

록웰 박물관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미국에서는 꾸준히 흑인 인권 운동을 전개해왔다. 1954년 브라운 판결로 인종분리 교육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졌지만 흑백통합교육이 실제로 이뤄진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960년 브리지스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백인 학교에 등교하면서부터였다. 1964년 미국 잡지 《룩(Look)》의 삽화를 담당했던 록웰은 흑인은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당시 편집 방침에 맞서 브리지스의 등교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표지에 올렸다. 그후 꾸준히 시민의 권리,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의 정책, 그리고 우주 탐험 등과 같이 좀 더 사회비판적인 문제들을 주제로 다루었다. 1977년 록웰은 대통령 자유 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았고, 2001년에는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올버니에서 40분 달려서 도착한 박물관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그 위치에서부터 알 수가 있었다. 양지바른 언덕에 세워진 박물관 건물은 아담하지만 엽서에 종종 등장하는 건축 양식이었다. 박물관 정원 곳곳에 신화나 영화 속 캐릭터 모형이 세워져 있었다. 생전 그의 작업실도 그대로 보존되어있었으며 그 작업실에는 할머니 도슨트가 우아하게 앉아서 방문하는 관람자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다. 봄날 소풍 오듯이, 정원을 거닐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보거나 가로수길을 양 팔을 흔들면서 걸어도 좋았다. 비가 그쳐 불어난 하천을 다리 위에서 바라보면서 앞으로 펼쳐질 시간들을 상상하는 것도 괜찮았다. 그곳의 공기는 록웰의 성품만큼이나 여유롭게 흐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