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明연합수군 군령 울려 퍼진 묘도, 7년 임란 최후 일전 준비
한중수교 30주년 기념 차이 나는 남도-중국 인연자원⑧ 이순신-진린 마지막 밤 보낸 묘도||이순신-진린, 여수 묘도에서 연합수군 편성||27일간 도독마을에 조·명연합군 사령부 설치||7년 조·일전쟁 종지부 찍을 ‘노량해전’ 준비||노량서 대첩 거두나, 이순신·등자룡 등 전사||도독마을에 이순신 진린 석상, 벽화거리 조성||인근 순천왜성, 검단산성에도 아픈 역사 흔적
2022년 10월 12일(수) 16:32

여수와 광양 사이의 바다인 광양만 한가운데 작은 섬이 있다. 고양이를 닮은 섬 여수 묘도다. 묘도는 조일 7년전쟁의 막바지인 정유재란 당시 조명 연합수군이 진을 치고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던 곳이다. 한중수교 30주년 기념 남도-중국 인연자원 시리즈 여덟 번째로 시진핑도 방한시 언급한 여수의 '묘도 도독마을'을 싣는다.

조명연합수군이 진을 쳤던 여수 묘도의 봉화대. 여수시 제공

묘도 도독마을 벽화

묘도 도독마을 벽화

섬의 형상이 고양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여수 묘도(猫島)는 괴섬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임진왜란 막바지인 정유재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진을 쳤던 섬이다. 북쪽으로는 이순신대교로 광양, 남쪽으로는 묘도대교로 여수와 각각 연결된 곳이다. 묘도에는 도독 진린이 주둔했다고 해서 붙여진 도독마을이 있다.

섬의 서쪽 봉화산(246m)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침입을 한양까지 알리는 역할을 했다. 산 정상에는 길이 2km에 달하는 도독성, 석축과 포대를 설치했던 흔적도 남아 있다. 봉화대에서는 순천왜성, 검단산성이 보인다. 또한 사천의 좁은 물목을 거쳐 노량으로 들어오는 모든 수군들의 상황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야말로 군사상의 요충지다.

이순신 장군이 병선을 대피시키고 군사를 조련시켰다 하여 붙여진 선장개는 당곡재 밑의 포구로 남산 능선과 봉화산 능선이 만든 계곡이다.

1597년 7월 24일 이순신과 진린은 군사 1만5000명과 전함 600척의 조·명 연합 수군을 이끌고 완도 고금도를 출발해 고흥의 절이도(금산)를 거쳐 9월 20일 묘도에 도착했다. 한 달여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왜군은 철군을 서둘렀다.

조·명 연합군은 철병하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사로병진군을 편성했다. 울산왜성을 공격 목표로 한 동로군, 사천왜성을 목표로 한 중로군, 순천왜성을 목표로 한 서로군, 진린과 이순신의 수로군이 그것이다.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 수군은 9월 21일 첫 전투에서 광양만의 장도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왜군 3000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비축되어 있던 군량미도 모두 불태웠다. 하지만 조명 연합 수군의 피해도 컸다. 명나라 전선 30척이 격침당하고 2000명이 전사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첨사 황세득과 휘하의 조선 수군 130명도 전사했다.

여수 장도

장도해전 이후 조·명 연합수군은 서로군과 함께 순천 왜성을 공격했다. 네 차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또한 서로군을 이끌었던 명나라 제독 유정이 왜군의 뇌물 공세에 넘어가 제대로 작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사로병진작전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사로병진책이 실패했지만,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퇴로를 열지 못했다. 안전한 철군을 위해 진린을 뇌물로 매수하려 했으나, 진린이 이순신의 설득에 마음을 돌렸기 때문이다. 마침내 11월 19일 퇴로를 열기 위한 일본 수군 500여 척과 조․명 연합수군 200여 척이 노량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였다. 이 해전에서 조․명 연합수군은 왜군 전함 200여 척을 격침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다.

하지만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이순신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 등자룡,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이 전사한 것이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왜군을 추격하던 중 흉탄에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한편 왜성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이 틈을 타 부산으로 퇴각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에 걸친 임진왜란도 끝이 났다. 묘도는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밤을 보낸 장소가 된 것이다. 진린은 노량 바다에서 숨진 이순신 장군과 등자룡 장군의 시신을 수습해 예를 갖춰 장례를 치렀다.

순천왜성(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순천왜성은 정유재란 당시 호남을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순천시 해룡면에 일본군이 쌓았던 성으로 왜교성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던 1만4000여 명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퇴각을 위한 최후의 방어기지 역할을 했다. 반면 검단산성은 왜성을 마주보고 있는 성이다. 백제 때 쌓은 성으로, 명의 육군제독 유정의 군사와 조선 육군 도원수 권율의 군사, 그리고 전라도 의병이 주둔했다. 이 두 성에서 왜군과 조․명 연합군 사이에 2개월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퇴로를 열어 일본으로 철수하려는 고니시는 유정에게 뇌물을 주고 공격을 멈추게 했다. 또한 진린에게도 뇌물을 주어 퇴로를 열려고 했으나 이순신이 진린을 설득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이 일어난 틈을 타 고니시는 부산으로 퇴각한 뒤 일본으로 철수했다

조선과 명나라가 연합군을 형성해 왜군에 대항한 묘도 도독마을에는 두 장군과 임진왜란을 기리기 위한 몇 가지 상징물이 있다. 이순신 장군과 진린 장군의 얼굴을 표현한 석상이 대표적이다. 똑같은 크기의 두 장군 석상은 마을을 바라보며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 시설물에는 이순신 장군이 전투 때 띄워 암호처럼 썼던 다양한 연 조형물도 부착돼 있다.

도독 마을에는 역사 자원을 활용한 벽화 거리도 조성돼 있다. 마을 주민들의 집 벽면을 활용해 만든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해전 모습, 조선 수군의 보직별 복장과 무기 종류를 비롯해 조선과 명나라, 왜군의 군복 모습 등 볼거리가 그려져 있다.

도독 마을을 비롯한 묘도 일대는 조·명 연합 수군을 테마로 한 역사공원도 들어선다. 108억원을 투입해 조·명 연합광장, 체험마당, 기념원, 데크 산책로와 어린이 놀이시설 등을 조성하고 있다.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