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돌담골목… 금성산 생태숲… 정겨운 '한글 마을'
나주 금안마을||세종과 훈민정음 창제·보급한||신숙주 생가 있지만 방치 상태||원 황제에 받은 황금안장 얹은||백마타고 금의환향 정가신 등||문관·무관 배출 '호남3대 명촌'||쌍계정·경열사·고방 터 등||지키고 보전할 유산 많은 곳
2022년 10월 06일(목) 16:10

경렬사. 정지 장군을 비롯 전상의, 정충신 등 8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돈삼

또 사흘 연휴가 기다리고 있다. 이번 연휴는 한글날 덕분이다. 한글날을 앞두고 '한글마을'을 찾아간다. 나주 금안마을이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했다. 세종의 명을 받은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보급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보한재 신숙주(1417∼1475)다. 신숙주의 태 자리가 금안마을이다. 금안마을을 '한글마을'로 부르는 이유다.

금안마을은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에 속한다. 신숙주는 1417년 금안마을에 있는 외갓집에서 태어나 7년 동안 살았다. 마을 한가운데에 신숙주의 생가 터가 있다. 집은 혼자 살던 할머니가 작고한 뒤 수년째 비어 있다. 처마엔 거미줄이 걸리고,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다. 나주시에서 생가 복원 방침을 밝힌 지 오래지만, 진척이 안 되고 있다.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왜곡된 이야기도 많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버렸다고, 쉽사리 변하는 숙주나물에 빗대 백성들의 놀림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단종복위를 시도한 날, 그의 부인이 '같이 죽지 않고 왜 돌아왔냐'고 나무라며 목을 맸다는 것이다. 후손들은 숙주나물을 짓이겨 만든 만두도 먹지 않는다는, 얼토당토않은 얘기까지 전해진다.

고방 터. 옛날에 선비의 과거 급제를 알리던 알림터다. 이돈삼

하지만 아니다.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 시도는 1456년 6월 1일 일어났다. 신숙주의 부인 윤씨는 그해 1월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신숙주도 그때 중국에 사신으로 가 있었다. 월탄 박종화가 소설 <목 매이는 여자>를 통해 신숙주를 폄하했다. 춘원 이광수도 <단종애사>를 통해 부인의 죽음을 단종복위 사건에 맞췄다. 일제강점기에 쓰여진 소설의 내용이다.

신숙주가 숙주나물을 좋아했다. 함길도 체찰사로 여진족을 정벌할 때다. 여진족이 숙주나물을 순식간에 길러 군량으로 쓰는 걸 본 그가, 녹두의 종자를 가져와 보급했다. 숙주나물을 유난히 좋아하고 잘 먹는다고 세조가, 그를 '숙주나물'이라고 불렀단다.

신숙주는 큰 학자이고 정치가였다. 조선 초기에 네 차례나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6명의 임금을 섬기며 좌의정과 우의정, 영의정 등 3정승을 두루 지냈다.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 몽골어, 여진어, 위구르어 등 8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금안마을 표지석. 광주 삼도와 나주시내를 잇는 도로변이다. 이돈삼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웠다. 훈민정음의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도 펴냈다. 문종 때엔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 때 수양대군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계유정난 때 김종서와 황보인을 몰아내고 공신이 됐다.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며 또 공신이 됐다. 신숙주는 임금을 대신해 일본과 중국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병법에도 조예가 깊었다. 위패를 사당에 영구히 두고 제사를 지내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불천지위를 하사받았다.

신숙주가 태어난 금안마을도 영암 구림, 정읍 수금과 함께 호남의 3대 명촌으로 꼽힌다. 고려 충렬왕 때 정일품 재상이 된 설재 정가신(1244∼1298)이 원나라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황금 안장을 얹은 백마(金鞍駿馬)를 타고 금의환향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됐다. 정가신은 신숙주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정가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쌍계정(雙溪亭)이다. 양쪽으로 작은 계곡이 흘렀다지만, 지금은 한쪽 물길만 남아있다. 수백 년 묵은 노거수와 어우러진다. 쌍계정은 정가신이 후학을 양성하려고 1280년에 지은 학당이다. 이름난 학자들이 교류했다고 삼현당(三賢堂)으로도 불린다. 신숙주도 여기서 강학을 했다고 전한다. 한석봉의 글씨가 편액으로 걸려 있다.

쌍계정. 나주정씨, 하동정씨, 풍산홍씨, 서흥김씨 등 네 성씨 문중이 운영했다고 '사성강당' 편액이 하나 더 걸려 있다. 이돈삼

보행보조기에 의지한 어르신이 쌍계정 앞을 지나며 길손에 말을 건넨다. "뭔 일로, 어디서 왔소?" "마을 구경하려고 왔습니다." "볼 것이 뭐 있다고?" 구순을 넘긴 어르신이 환하게 웃어주며, 가던 길을 재촉한다.

마을에 정가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설재서원이 있다. 영의정을 지낸 청백리 사암 박순을 모신 월정서원, 동방5현으로 문묘에 종사된 김굉필을 추모하는 경현서원도 있다. 유학의 정통성을 잇는 서원이 3개나 있다고 '서원동네'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고려 장수 정지(1347~1391)를 기리는 경열사도 마을에 있다. 광주에 있는 경열사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오래 됐다. 1914년에 세워졌다. 1600년대 중반 광주 동명동에 처음 세워졌던 것을 옮겨 다시 지었다. 정지는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말 3대 무신으로 꼽힌다. 40여 척의 전선으로 왜구함대 120여 척을 물리친 관음포대첩을 이끌었다. 경열사에는 정지 외에도 전상의, 정충신 등 7명의 위패를 더 모시고 있다. '팔현사'로도 불린다.

금안마을의 자치규약인 대동계의 역사도 깊다. 임진왜란 때 김천일을 도와 의병을 일으킨 홍천경 등이 주도한 것으로 전한다. 나주정씨, 하동정씨, 풍산홍씨, 서흥김씨 등 네 성씨 문중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대동계의 모임 장소가 쌍계정이었다. 쌍계정을 사성강당(四姓講堂)으로도 부른다. 지금도 마을주민들의 크고작은 모임이 여기서 이뤄진다. 대동계를 400년 넘게 이어왔다고, 마을주민들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금안리는 1구 광곡과 수각, 2구 원당과 반송, 3구 인천마을로 이뤄져 있다. 넓은 골에 터를 잡았다고 '광곡(廣谷)'에서 '광곡(光谷)'으로 바뀌었다. 쌍계정 양쪽으로 개울이 흐른다고 이름 붙은 '수곡(水谷)'은 나중에 '수각(水各)'으로 변했다. 원님이 살았고 금안동에서 으뜸이라고 원당(元當), 반석 같은 지형에 노송이 많았던 '반송(盤松)'은 '반송(半松)'으로 바뀌었다. 정가신이 터를 잡은 인천(仁川)은 숲을 울타리 삼았다고 한때 '이내촌'으로 불렸다.

쌍계정과 노거수. 누렇게 물드는 벼논과 어우러져 있다. 이돈삼

돌담으로 이어진 골목이 단아하고 멋스럽다. 돌담의 높이도 어깨를 넘지 않아 정겹다. 돌담길을 따라 싸목싸목 걷는다. '고방 터'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옛날에 선비의 과거 급제를 알리던 알림터라고 씌어 있다. 인물의 고장임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예사롭지 않은 마을이다. 우리가 소중히 지키고 보전해야 유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월정서원 뒤편의 금성산 생태숲도 아름답다. 숲길 오붓하고,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새소리도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마음도 느긋해진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척서정. 정해일이 지조와 절개를 담아 지은 정자다. 이돈삼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