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8월 17일(수) 17:29 |

서홍원 교수.
〈맥베스〉라는 비극은 세 마녀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이 마녀들은 반란군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맥베스의 길을 막고 그가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던진다.
"모두 만세를 불러라, 맥베스에게!"라며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마녀들의 예언은 도발에 더 가까웠는데, 도발이 예언이 되기까지는 맥베스의 결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녀들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충직한 장수로 보였고, 설사 야망이 있었다 하여도 이를 철저히 누르고 신하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는 모습이었다.
마녀들은 맥베스를 왕으로 부르기 전에 그를 글라미스(Glamis) 영주이자 코도(Cawdor) 영주로 칭했는데 맥베스는 현 글라미스 영주일 뿐 코도 영주는 맥베스가 전장에서 죽인 반란군의 수괴였다. 그러나 맥베스는 코도의 영지를 포상으로 하사받게 된다.
예언 하나가 적중했으니 그 다음 예언도 가능한 것인가? 맥베스는 이를 과감하게 실행시킬 수 있을까? 이것을 실행시킬 수 있는 의외의 인물이 등장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1막 5장. 맥베스의 영지 내 인버네스(Inverness) 성안. 맥베스 부인이 남편으로부터 온 서신을 읽으며 등장한다. 편지에는 마녀들의 예언과 코도 영지를 하사 받은 내용까지 세세히 묘사되어 있고 맥베스의 야망이 지펴지기 시작했음을 알리는데, 절제된 맥베스의 야망과는 달리 맥베스 부인의 야망은 날것 그대로 드러난다.
당신은 글라미스이고 코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약속된 것[왕]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걱정은
당신의 성품이 인간의 선한 모유로 너무 가득하다는 것.
이런 남편의 선한 성품이 그의 야망에 걸림돌이 될 것이므로 자신이 직접 남편을 이끌어야겠다고 다짐하는 맥베스 부인에게 기대하지도 않았던 소식이 찾아온다. 편지에 이어 전령이 소식을 전해오는데, 남편과 함께 던컨왕이 인버네스 성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맥베스 부인은 야망을 실행으로 옮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곧바로 살인을 계획한다.
던컨이 내 성곽 아래로 죽으러 들어오고
있음을 울음소리로 알리는 까마귀조차
목이 쉬었다. 오라, 죽음을 계획하는
너희 악령들아. 여기, 내 여성을 벗겨라.
그리고 머리 꼭대기부터 발가락 끝까지 가장 치명적인
잔인함으로 가득 채워라.
까마귀의 거친 울음소리가 던컨왕의 시해 음모를 알리는 가운데 맥베스 부인은 자신의 여성성을 벗어던진다. 영어 원문은 "Unsex me here"이다. 나의 여성성을 여기서 없애라는 충격적인 선언이다. 마치 여성으로서의 옷을 벗어던지고 머리부터 발까지 남성의 잔인함으로 채워달라는 주문은 마녀들의 흉측한 등장보다도 더 두려움을 자아낸다.
내 피를 응고시켜서
회한으로 가는 입구와 통로를 틀어 막아라.
자연이 보내는 양심의 가책이 나의 잔인한
목적을 흔들거나, 내 목적과 자연 사이에서
평화를 중재하지 못하도록.
그녀가 피를 응고시키려는 이유는 양심과 후회를 유발할 수 있는 모든 통로를 막고 싶기 때문인데, 당시의 통념으로 양심은 여성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오라, 내 여인의 가슴으로.
내 모유를 담즙 삼아 먹어라, 너희 살인적인 하수인들아,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너희가 자연에 해를 끼치기 위해
어디서 기다리던 간에.
자연이 양심과 평화를 내세워 던컨의 살해를 방해한다면 그런 자연에 해를 끼칠 '살인적인 하수인들', 즉 보이지 않는 영령들의 악의를 키우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모유를 담즙 대신 제공하겠다고 한다. 이는 모성애를 살인적인 악의로 대체시키는 충격적인 발언이다.
오라, 짙은 밤이여,
가장 짙은 지옥의 연기로 가려라.
잘 벼려진 내 칼이 그것이 내는 상처를 볼 수 없도록,
또는 하늘이 어둠의 장막을 뚫어 목격하고
"멈춰, 멈춰!" 소리치지 못하도록.
맥베스 부인의 상상 속에서 던컨의 살해는 이미 행해진 것이다.
던컨을 성으로 맞이한 후 맥베스가 여전히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맥베스 부인은 여성성, 특히 모성을 버린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보이는데, 자신은 아기에게 수유를 한 적 있으며 젖을 먹는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안다면서, 그렇지만 만약 한번 거사를 결정했다면 아이에게서 젖을 바로 떼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서 뇌수를 흐르게 할 의지를 보여야 함을 말한다.
남편의 우유부단함을 답답해 하던 맥베스 부인은 거사 당일밤에도 과단성을 보이는데, 던컨을 살해하고 정신줄을 놓은 맥베스가 양손에 피묻은 단도를 들고 들어오자 맥베스 부인은 그 단도들을 가로채서 살인 현장으로 간다. 그리고 던컨의 피를 손에 묻혀서 잠든 파수꾼들의 몸 여기저기에 발라놓는 여유까지 부린다.
다만, 그녀가 손에 묻힌 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가 의식적으로 버린 회한의 통로로 스며들어서 밤마다 그녀를 괴롭힌다. 극의 후반부에 의사와 시녀가 지켜보는 몽유병 환자로 나타난다.
"아직도 여기에 (피)자국이 있어…… 그런데 그 늙은이가 그렇게나 많은 피를 담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아직도 피 냄새가 있구나. 아라비아의 향수를 다 써도 이 작은 손을 향기롭게 하지 못할꺼야. 오, 오, 오!"
이런 고백 아닌 고백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결말에 그녀의 죽음은 구두로만 남편에게 전달된다. 여성으로서의 제약을 잔인하게 벗어던진 비극의 또 다른 주인공의 결말이다.

2018년 영화 '맥베스'에서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이 대화하고 있다.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