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8월 10일(수) 16:18 |
"3·1운동의 주동자는 나다. 쇠는 불에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더 단단해진다. 얼마든지 해볼 테면 해봐라!" 광주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김복현(金福鉉, 1890~1969)이 법정에서 한 말이다. 이후 김복현은 '철(鐵)'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되면서 김철로 불린다. 그는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지만, 그가 꿈꾼 통일 조국의 꿈을 가슴에 묻은 채 생을 마감한다.
김철이 남긴 항일 정신은 장남 김재호(1914~1976)로 이어진다. 김재호는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 단원이 되고,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치열한 독립전사였다.
김철에서 김재호로 이어지는 항일 정신의 뿌리는 한말 나주 의병을 이끈 김철의 부친 의병장 김창곤이었다. 할아버지를 이어 아들이, 그 아들의 아들이 또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싸운 것이다.
한말 나주 의병장, 김창곤
김재호의 할아버지 김창곤(김창균으로도 불림)은 광주·전남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의병장 중 한 분이다. 한말 남도는 최대 의병 항쟁지였다. 그 출발이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변복령이 배경이 되어 일어난 장성·나주 의병이다.
먼저 일어난 곳은 장성이었다. 노사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이 기삼연, 고광순 등과 함께 1896년 1월(음력) 장성향교에서 창의(倡義)한다. 그리고 도내에 "이 통탄스러움을 다시 무어라 하겠는가?…… 국모를 시해하고 군왕을 위협하면서 못할 짓이 없으니 기강은 이미 무너져버렸고, 관복을 벗기고 머리를 깎아도 마음에 걸리지 않으니 중화와 이적의 행위가 드러났지만 나라 안에 나설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 기우만은…… 말고삐라도 잡고 앞장서기를 원하며 이와 같이 통지하오니 공손히 화답하기를 기대한다"라는 격문을 보낸다.
나주에 기우만의 격문이 도착하자 양반 유생과 향리들이 중심이 되어 2월 1일(음력) 나주향교에서 거의를 결의하고, 다음날 이학상을 의병장에 추대한다.
2월 9일 밤 나주 의병은 행동을 개시, 나주 관아를 급습하여 관찰사 대리업무를 수행하면서 단발에 앞장서던 참서관 안종수와 박(朴)총순(總巡)·여(呂)순검(巡檢)을 처단한다. 개화파인 안종수 등의 처단은 친일정권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 표현이었다. 그리고 "참서관 및 총순 무리들은 역정의 도당으로 이제 다 맞아 죽었으니 본 고을의 의병은 처음만 있고 끝이 없어서는 안된다"라고 하고, 이학상을 추대하여 의진을 구성한다. 그리고 다음 날 연리청(椽吏廳)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부서를 배정한다. 창의소가 향교에서 향리들의 근무처인 연리청으로 바뀌었음은 나주 향리들이 의병의 주도권을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유생인 이학상이 대장에, 향리 출신인 김창곤은 좌익장으로 추대된다. 김창곤의 아들 석현도 안종수의 처단에 참여하는 등 나주 의병의 핵심이 된다.
기우만이 이끈 장성의병이 2월 11일 나주향교에 도착하여 공동 의진을 형성하는 등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선무사 신기선이 이끈 관군 1,500명이 전주에 도착하여 호남 의병의 해산을 촉구하자, 나주 의병은 2월 26일 자진 해산하였고 이어 장성의병도 해산된다.
나주 의병은 해산되었지만, 장성 의병들에 비해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나주 의병의 배후 조종자였던 해남군수 정석진은 체포되어 나주로 이송된 뒤 친위대를 따라온 안종수의 동생 안정수에 의해 처형된다. 그리고 나주 의병의 좌익장인 김창곤과 그의 아들 석현도 체포되어 1896년 3월 26일 처형된다. 아버지 김창곤은 55세, 아들 석현은 32세였다. 나주 의병에 직접 가담한 자 중 처형된 분은 좌익장 김창곤과 그의 아들 김석현 뿐이다. 나주 의병에 부자가 함께 참여하였고, 부자가 함께 순국한 것이다. 정부는 김창곤과 아들 석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한다.
광주 3·1만세 운동의 총 책임자, 김복현(김철)
나주 의병의 좌익장 김창곤의 다섯째 아들이자 석현의 동생인 김복현은 후일 광주 3·1운동의 주역이 된다. 아버지와 형의 항일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번진다. 광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3월 10일 광주천 큰 장터에서 시작하여 부동교 옆 작은 장터에서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 부른다. 숭일·수피아여학교 학생들도 참여하였지만, 시장에 모여든 시민들이 다수였다. 당시 광주 인구가 만여 명이었는데, 천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였다. 광주 3·1독립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실천한 총 책임자가, 나주 의병 좌익장인 김창곤의 아들 김복현이었다.
"국헌을 교란시킨 죄는 사형에 처해 마땅하나 관대히 다스리겠다"고 일본 재판관이 훈계하자, 김복현은 "이번 운동의 책임자는 나다. 내 지시에 따른 학생들은 그냥 내보내라. 그리고 내 이름은 김철이다. 나는 불에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얼마든지 해보라" 면서, 이번 광주 만세운동은 전적으로 자기 한 사람에게 죄가 있을 뿐이라고 항변하였다. 이는 김복현이 광주 3·1운동의 대표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때부터 김복현은 김철(鐵)로 불리다, 후일 김철(哲)로 바뀐다.
3년형을 치른 후 김철은 '예비검속 대상자'로 분류되었고 늘 일제의 감시대상자였다. 어디서건 독립운동의 징후가 발견되면 늘 유치장이 집이 되었다. 해방 후 김철은 전남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된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강석봉·국기열 등 광주 3·1운동 당시 동지들과 힘을 모아 사회대중당(이후 통일 사회당)을 결성한 후 통일 사회당 고문을 맡아 민주주의의 완성과 조국 통일을 위한 마지막 투쟁을 전개한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로 꿈은 짓밟혀 버렸고, 1969년 민주주의와 통일의 비원을 가슴에 묻은 채 생을 마감한다. 1990년 정부는 김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김재호와 신정완
김철의 장남인 김재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김재호는 전주 신흥중학교에 재학 중인 1933년 2월,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에서 파견된 비밀공작원인 정의은을 따라 중국으로 밀항한다. 비밀공작원인 정의은은 광주 출신으로 '신중국 건설 100대 영웅'으로 선정된 정율성의 형이다. 이때 정율성도 함께였다.
김재호는 김원봉이 만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제2기생으로 졸업하고 의열단원의 일원으로 임무를 부여받고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한다. 1937년, 김원봉이 중심이 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중일전쟁 당시에는 제2전구 산서성(山西省) 일대에서 선무·초모(宣撫·招募) 활동을 전개한다.
이후에는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충칭의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부름을 받는다. 1942년, 임시의정원의 전라도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43년에는 임시정부에 신설된 선전부 선전위원이 된다. 당시 초대 선전부장은 김규식이었다. 이어 임시정부의 내무부 사회과장, 1944년에는 내무부 총무과장에 임명되는 등 임시정부의 실무를 담당했다. 1945년 해방되었지만, 그의 귀국은 1946년 5월에야 이루어진다. 임시정부의 잔무를 정리하는 일 때문이었다.
귀국 후 그는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1969)과 박정희의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선언(1974)에 독립운동가를 대표하여 참여하는 등 이 땅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데도 앞장 선다.
그의 부인 신정완은 해공 신익희의 따님이다. 임시정부에 의해 산동성에 파견되어 지하공작 첩보활동 등을 전개하였으며,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독립의 여걸이었다. 정부는 1990년 김재호와 그의 아내 신정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한다.
김철 가문은 부친 김창곤, 아들 김재호로 이어진 3대에 걸쳐 5명이 건국훈장을 받는다. 김철과 김재호는 해방 후 반독재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에도 참여한다. 나주 출신 김철 가문은 3대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광주·전남 최고의 항일 독립운동 가문이 아닐 수 없다.
호남 3대에 걸쳐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김철 가문의 흔적은 무덤밖에 없다. 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기념관도 동상도 없다. 안타깝다.
김창곤, 김철의 무덤을 찾다
김철 집안은 살핀 대로 3대에 걸쳐 다섯 분이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집안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후손들이 나주에 살지 않은 것도 한 이유이겠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게으름도 한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역사를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필자마저도 나주의병장 김창곤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서울에 사는 김철의 아드님인 김달호씨로부터 무덤의 위치를 설명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나주 향리였던 김창곤과 그 후손들은 모두 나주에서 태어난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보면 김철과 김재호의 주소가 나주시 금성동 25번지로 되어 있다. 김창곤과 석현, 그리고 김창곤의 아들 김철의 무덤이 나주에 있는 이유다.
김창곤 부자의 무덤은 나주에서 목포로 가는 길, 나주 시내를 벗어나기 위해 넘는 맛재 바로 못 미쳐 오른쪽에 있었다. 입구에는 안내판 대신 '의병장 김창곤 묘소'라고 쓴 비가 서 있고, 위쪽으로 김창곤과 그의 아드님 등 10여 기의 무덤이 있다. 제일 위 오른쪽이 의병장 김창곤의 무덤이다. 의병장의 무덤답게 큰 봉분이었고, 봉분 주위에는 돌을 돌렸다. 오른쪽에 1986년에 건립한 '의병장 김해김공창곤지묘(義兵將金海金公蒼坤之墓)'라 새긴 비가 서 있는데, 비문은 국회의원 송원영이 썼다. 내용은, 김창곤과 그의 두 아들 석현과 복현(철), 그리고 손자 김재호의 3대에 걸친 항일독립운동을 기록하고 있다. 서울 국회의원인 송원영이 어떤 연유로 글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창곤에 대한 설명은 빈약했다.
김창곤 의병장의 아들인 석현의 무덤은 아버지 창곤의 무덤 아래에 있었다. 봉분은 돌로 두르지 않았고 비도 없으며, 달랑 상석 하나만이 놓여 있다. 그 상석에 무덤의 주인공 김석현과 그의 부인 경주최씨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나주의병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국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의 묘인데, 정말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입구에 두 분의 항일 의병활동을 알리는 표지판부터 세우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는 아닐까 싶다.
나주 북초등학교 왼쪽 산록에는 김창곤의 아들로 광주 3·1운동의 주역인 김철의 무덤이 있다. 김철의 무덤을 찾아가려면 학교 안으로 굳게 잠긴 담장을 넘어가야 한다. 무덤은 아담했다. 무덤 왼쪽에는 1976년 세워진 '독립지사김철묘(獨立志士金哲墓)'라 새긴 비가 서 있다. 그리고 가까이에 표지판을 설치하여 김철 선생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비문은 문학박사 박성봉이 짓고, 김철을 도와 광주 3·1운동을 주도한 최한영이 글을 썼다.
3월 1일, 삼일절만 되면 나주의 유지들이 찾아와 참배한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 김철의 묘는 가묘다. 대전 현충원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시신은 옮겨갔지만, 그의 혼은 아직 나주 가묘에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김창곤과 그의 아들인 김석현과 김철, 그리고 손자 김재호의 흔적을 그들의 고향인 나주에서조차 찾기는 쉽지 않다. 김창곤의 의거 현장인 나주향교 및 연리청, 순국지에도 김창곤과 그의 아들 석현을 그들을 기리는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광주 3·1운동의 주역 김철의 흔적 찾기도 마찬가지다. 광주 3·1운동의 발발지인 광주천과 행진루트였던 충장로 어디에도 김철을 기리는 기념시설 하나 없다. 김철이 외친 '대한독립만세'는 이제 메아리가 되어 남아 있을 뿐이다.
김창곤, 김철, 김재호로 이어지는 김철 가문의 항일정신은 해방 이후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다. 남도가 '정의로움'의 고장으로 불리게 된 것은 김철 가문의 3대에 걸친 실천이 크게 한몫을 했다.
그러나 오늘 남도 최초의 의병장 김창곤과 그의 아들이 묻힌 무덤 앞에 항일의병장이었음을 알리는 표지판 하나 없다. '의향' 남도의 민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