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참전 明 장수 진린 후예가 뿌리내린 해남 '황조마을'
한중수교 30주년 기념 차이 나는 남도-중국 인연자원④ 400년 한·중 우정 상징 해남 ‘황조별묘’||명나라 패망 후 건너 온 진린 후손 정착||진린 장군과 선조 모신 사당 세우고 향사||고종 8년 ‘황조별묘’ 건립, 2년마다 제사 ||싱하이밍·추궈홍 등 주한 중국대사 참배 ||중국 광둥성 옹원현 문중과 지금도 교류||요우커 겨냥 헤리티지 투어리즘 최적 자원
2022년 07월 20일(수) 17:10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 전경

수백년 전 떠나온 고향 생각을 품었을까. 해남 산이면 황조리에는 중국쪽을 바라보고 선 집들이 많다, 광동진씨(廣東陳氏) 집성촌 황조마을. 우리나라를 찾았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명나라 통수 진린의 후예가 조선에서 뿌리를 내렸다'는 바로 그곳이다. 한중수교 30주년 기념 남도-중국 인연자원 시리즈 네 번째로 400년 한·중 우정 상징 해남 '황조별묘'를 싣는다.

해남군 산이면 덕송리 황조마을에 있는 황조별묘(皇朝別廟). 진린과 아들 진구경, 손자 진조, 증손자 진석문 등 4대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진린 장군의 후손들이 황조별묘를 방문했다.

황조별묘 외삼문

2015년 최장수 중국대사로 이름을 올렸던 추궈홍 중국대사의 방문에 이어, 2020년 싱하이밍 중국대사가 다시 해남을 찾았다. 주한 중국 대사들은 취임하게 되면 방문 필수코스로 해남을 꼽는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400년 한·중 우정의 상징인 '황조별묘'가 해남에 있기 때문이다.

황조별묘가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2014년 국빈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서울대 강연이다. 시 주석은 한·중 우호 인물로 임진 7년전쟁 때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과 등자룡(鄧子龍)을 거론했다.

그는 "한국과 중국은 수천년을 거쳐 두터운 정을 쌓은 이웃"임을 강조하고,"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조선 왕조의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순국하였으며, 오늘날 에도 진린의 후손이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언급해 큰 관심을 모은 바 있다.

또 문재인 전 대통령도 베이징대 강연에서 "한국에는 지금 진린 장군의 후손들이 2000여 명 살고 있다"며 중국과 한국이 고난을 함께 겪고 극복한 동지임을 강조했다.

명나라 장수 진린, 그를 모시는 사당이 해남군 산이면 덕송리 황조마을에 있는 황조별묘(皇朝別廟)이다. 황조별묘에는 진린뿐만 아니라 아들 진구경, 손자 진조(진영소), 그리고 증손자 진석문까지 모두 4대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진린은 누구인가.

광동 진씨의 시조 진린(1543~1607)은 중국 광동성 옹원현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영천 진씨로, 19세의 어린 나이에 파총(把摠)에 발탁되었고, 광동성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여 인정을 받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명에게 다시 원군을 청했다. 이때 명나라는 수군 5000여 명과 군선 500척을 파견했다. 명나라의 수군을 이끌고 왔던 사람이 바로 진린 도독이다.

진린의 수군은 1598년 7월 16일 지금의 완도 고금도에 딸린 작은 섬 묘당도에 진을 쳤다. 여기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고금도 덕동에는 백의종군하였다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진을 치고 있었다.

첫 대면에 이순신과 진린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진린이 황제의 군대라고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장군은 명나라 대장으로 이곳에 와 왜적을 토벌하는 일인데, 우리 진중의 승첩이 장군의 승첩이 아니겠소. 우리가 잡은 적의 수급을 장군께 드릴 테니 본국의 황제께 승첩을 아뢰십시오."하고 진린을 설득했다.

이에 진린이 이순신의 인품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전투를 거듭할수록 진린은 이순신의 지휘력과 인품에 깊이 탄복해 명나라 신종에게 8가지 선물(영패, 도독인,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을 내리도록 보고했다. 또한 이순신을 부를 때는 이야(李爺), 노야(老爺)라 칭했고, 심지어 중국에 들어가 벼슬하기를 여러 차례 권했다고도 한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순신과 진린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을 끝내게 되었다. 진린은 귀국 후 광동백에 봉해졌다가 1607년 사망해 태자소보(太子小保)에 추증됐다.

진린의 아들 진구경은 정유재란 때 아버지를 따라 참전했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의 배가 적에게 포위되어 위험에 처하자, 직접 지휘하여 이순신의 함선을 구했다. 또한 아버지 진린이 위급해지자 적의 칼날을 온몸으로 저지하다 크게 부상을 입기도 했다.

진린의 손자이자 진구경의 아들 진조(陳詔)의 자는 영소(永溸)로, 감국수위사에 임명되었지만 청의 침략으로 의종 황제가 나무에 목을 매고 자결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했다.

명나라가 망하자 진영소는 "원수들과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다."며 조선으로 이주를 결심했다. 1644년 난징에서 출발한 진영소는 남해 장승포에 도착했다. 이후 조부 진린이 진을 쳤던 완도 고금도로 옮겨와 살다가 다시 해남으로 나와 정착하면서 결혼하여 아들 석문을 낳았다.

진석문은 1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해남의 현재 위치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후에 마을 이름을 명나라 황제의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한 충신의 후예가 유민으로 들어와서 산다는 의미로 황조마을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마을의 집들은 중국 방향인 서향집들이 많다. 현재 광동 진씨는 전국적으로 2000여명이 살고 있으며, 황조마을에는 6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지금도 진린의 고향인 광동성 옹원현의 영천 진씨 문중과 교류가 이어지고 있으며 2년에 한 번씩 한식날 중국에 있는 진씨들이 제사를 지내러 이곳을 찾는다.

2003년 11월 24일 향토문화유적 제10호로 지정된 해남군 산이면 황조별묘(皇朝別廟)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면적은 165.2㎡이다. 추녀는 활주로 받쳤으며, 솟을삼문이 있다.

1680년(숙종 6) 단을 만들어 진린을 제향하다가 1871년(고종 8) 별묘를 건립했다. 그후 1960년에 소슬 3문을 신축했고 1976년과 1983년 중·개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면 중앙의 창방 상부에는 황조별묘의 현판이 걸려 있다. 공포는 기둥머리에서 창방과 교차된 초익공(初翼工) 양식이다. 가구는 3량으로 기둥 상부의 초익공과 창방이 교차되어 주두와 소로가 놓이고 그 위에 대량(大樑)과 주심장여, 주심도리가 결구되는 방식이다.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고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용마루와 지붕의 좌우측단부 경사면에 내림마루를 두었다. 좌우 측면에는 풍판(風板)이 설치되어 있다. 영정은 1997년 중국 옹원현(翁源县)정부에서 그려 와 헌정한 것이다.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