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농민운동 관련 수감자 116명 명예회복 총력"
●신안 농민운동 현장을 가다||(1)농민운동 재조명 본격화 ||신안농민운동기념사업회 등 성과 ||활동 2년 만 24명 독립유공자 포상 ||유적지 발굴·정비사업 추진 과제
2022년 06월 23일(목) 17:14

신안에 있는 암태도 소작인항쟁기념탑.

신안군이 민선 7기에서 주력했던 '신안농민운동'에 대한 명예회복이 어느 정도 성과를 마무리하고 후반부에 들어섰다. 신안군은 지난 2년 동안 농민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관련 연구용역을 추진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후손 발굴 및 독립유공자 선정에 총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박우량 신안군수가 재선에 성공함에 따라 민선 8기에서는 신안농민운동기념관 및 기념탑 설립과 학술 및 문화 행사 추진이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단순 생존권 투쟁 아닌 '항일운동'

신안농민운동은 일제강점기 기간에 섬 농민들이 소작료를 두고 지주와 투쟁한 일명 '소작쟁의'를 의미한다.

소작은 농토를 갖지 못한 농민이 다른 사람의 농지를 빌려 농사를 짓고 땅을 빌린 대가로 지주에게 소작료를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신안에서 지주들이 막대한 소작료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불합리한 소작률을 개선하기 위해 저항하면서 '신안농민운동'이 시작되게 된다.

신안농민운동에서 성격의 주축을 이루는 소작쟁의는 단순하게 농민이 땅을 가진 지주에게 저항하는 생존권 투쟁으로 보이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항일민족운동'이라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기간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투쟁의 대상인 악덕 지주는 일제의 식민 경제정책의 성장했고 일제 권력의 기반 위에서 지주권을 행사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주가 소작료를 늘린 이면에는 일제가 한반도를 일본의 쌀 공급처로 삼기 위해 실시한 '산미 증식 계획'이 숨어 있는 것이다.

시작은 암태도였다. 암태도 농민들이 제일 먼저 '소작료 4할' 요구를 성공으로 끌어냈는데, 이 과정에서 소작인들은 암태도 대지주 문재철 일가에 저항하기 위해 불납동맹, 아사동맹을 전개했다. 특히 아사동맹의 경우 주민 600여명이 목포까지 원정투쟁에 참여한 것으로 최근 연구에서 보고되고 있다. 또 일제 경찰이 암태도 소작쟁의에 참여한 죄를 물어 서태석 징역 2년, 서창석 1년 등 소작인회 간부 19명을 구속했다. 뿔뿔이 흩어져 끊긴 줄로만 알았던 서태석 후손들이 미국에 머무는 것으로 최근 신안군의 기초조사 과정에서 확인되기도 했다.

소작인항쟁기념탑에 새겨진 항쟁의 주역들.

암태도에서 시작된 소작쟁의는 지도, 자은도, 도초도, 매화도, 하의도 등 인근 섬으로 퍼졌다. 지도는 암태도에 이어 2번째로 소작료 4할을 쟁취했으며 김상수, 나만성 등 근대교육을 통해 성장한 청년 지식인들이 주도했다는 성격을 띤다. 특히 소수의 일본인 대지주 우치다, 하시모토는 조선인 지주들을 끌어들여 소작쟁의를 방해할 목적으로 지주회를 결성했지만,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 일제 항일운동의 성격이 크다고 평가받는다

자은도는 암태도의 소작료 4할 쟁취에 영향으로 받아 소작인들이 핵심 지주에게 소작료 인하와 농업장려비에 대해 지급 약속을 받아냈으나, 지주들이 이를 지키지 않으면서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이 과정에서 지주들은 소작인들을 사회주의자로 몰고 일제 경찰이 여기에 편승하면서 좌우대립으로 인한 주민들의 2차 고난이 이어졌다.

도초도의 경우 소작인회 결성과 동시에 소작료를 낮추기 위한 활동이 전개됐고 이를 수용하지 않는 지주를 상대로 소작료 불납 운동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도초도 면장이 지주들을 옹호하면서 갈등이 커졌는데 주민들 힘으로 면장 교체를 끌어내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대지주들이 단합하면서 농민들의 투쟁에 대항했고 무장경찰들이 마을을 습격하는 등 피해가 컸던 지역이기도 하다. 농민들은 굴하지 않고 목포와 광주까지 원정 투쟁을 나서기도 했다.

목포경찰서 앞으로 원정 투쟁에 나선 도초도 주민들.

매화도의 경우 서치규·서인섭 부자가 대지주로 성장하면서 소작쟁의 시초가 됐다. 특히 서치규 일가는 소작료 5할, 농민들은 4할을 요구하면서 대립이 심화됐고 일본인 검사가 있었던 당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도 지주들의 편을 들면서 소작쟁의는 실패로 끝났다.

하의도 농민들은 조선시대 세도가, 일제강점기 식민지주, 해방 이후 정부를 상대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300여년 간 끈질긴 저항을 이어오는 등 역사가 깊다. 하의도 농민들은 19세기 전반까지 봉건권력에 기댄 세도가를 대상으로 토지운동을 전개했으며 일제강점기 들어서는 식민권력을 지원한 식민지주에 대항해 토지소유권 회수를 위한 조직적인 운동을 이어갔다.

●독립유공자 지정까지 86명 남아

신안군 농민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출범 이후 23일까지 신안농민운동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신안농민운동 관련자는 24명이다. 신안농민운동기념사업회가 2여년동안 수감자의 행적, 수감기록, 가족관계증명원 등의 증빙자료를 파악해 후손을 찾았으며 이들이 서훈을 신청할 수 있도록 도왔다.

기존에 이미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서태석(2003년 애국장) △박복영(1990년 애족장) △나만성(1993년 건국포장) △김종언(2018년 대통령표창) 이상 4명을 포함, 이번에 기념사업회가 발굴한 24명까지 신안농민운동 관련 독립유공자는 총 28명이다.

신안군 농민운동기념사업회가 독립유공자 지정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관련 수감자는 116명이다. 116명의 목록은 신안군이 기념사업회를 설립하기 전 기초조사를 목적으로 진행한 연구용역 결과에서 가져왔다.

당시 연구용역을 진행한 목포대학교 사학과 최성환 교수 연구팀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부터 1928년까지 5년 동안에만 신안군 지도, 자은도, 암태도, 도초도, 매화도, 하의도 등 모두 6개 섬에서 농민운동이 전개됐다"면서 "이 시기에 농민 총 325명이 농민운동에 참여했으며, 구속자만 123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당초 신안군 농민운동기념사업회는 최성환 교수 연구팀이 밝힌 구속자 123명 중 판결문 기록을 찾을 수 없는 7명을 제외하고 116명에 대해 독립유공자 지정 목표를 세웠다. 현재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28명과 선정 과정에서 탈락한 2명을 제외하면 86명이 남은 셈이다. 구속자들은 공무집행방해, 업무방해, 소요, 상해, 주거침입, 공갈, 협박죄 등을 적용해 징역 2년에서부터 벌금 20원 등 다양한 형량을 부과받았다.

고승재 사무국장은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에 있어서 현재 증빙자료 확인 작업에 있는 86명의 농민운동 관련자들 명예회복을 위해 총력을 다할 예정이다. 다만, 시대적 특성상 증빙자료에 등록된 이름과 실제 집에서 불리던 이름이 달라 확인작업이 더뎌지고 있다"며 "2년 동안 24명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는 성과를 이뤘지만, 나머지 분들도 독립유공자 지정될 수 있도록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신안농민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고승재 신안군 농민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이어 "사업회 1차 과제는 신안농민운동 명예회복을 위한 서훈 등록이었다. 이 과정에서 알려지지 않은 후손들이 발굴됐고 독립유공자에 대해 명예회복을 이뤘다"며 "남은 기간 농민운동사를 망라한 단행본 제작하고 세미나를 진행하는 등 학술적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신안 문화관광과도 신안농민운동기념관 및 기념탑 설립에 박차를 가한다. 기념탑의 경우 올해 안으로 7억원의 군비를 확보할 예정이며 현재 기념탑이 없는 도초면, 자은면, 압해도 매화리(매화도), 지도 등 4개 섬에 세워질 전망이다. 기념관은 문화체육관광부를 통해 최대 50억원의 예산 확보를 목표하고 있으며 건립 예정지는 농민운동이 시작된 암태도가 거론되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혜인 기자 kh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