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홍 선생 학술상
2022년 06월 16일(목) 16:23
이기수 수석 논설위원
 '산수(傘壽·나이 80세를 일컬음)의 고비를 넘어서야 이제 겨우 무등산이 보인다. 무등산과 맺은 인연을 거슬러 보면 이 고장 최초의 산악단체인 전남산악회를 창립한 것이 1955년이니 반세기를 훌쩍 넘긴 셈이다.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의 창립에 참여한 것이 1989년이니 무등산 사랑운동이 범시민운동으로 뿌리를 내리 게 된 것도 20년 가까운 세월이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원족(소풍)으로 무등산 정상에 처음 오른 이후 지금까지 무등산의 높이인 1187회 정도는 등정한 것같다. 산행할 때 사람들이 마음을 여는만큼 무등산은 어머니같은 인자함으로 뭔가 뜨끈한 선물을 안겨준다. 우리가 다함께 무등산을 소중하게 지켜내고 가꿔야할 이유가 아니겠는가. 이는 ' 전남일보 2009년 10월 6일자 기획연재물 '무등산에 기대어'에 게재된 박선홍 선생(1926~2017)의 글중 일부다. '무등산에 기대어'는 제목대로 광주시민들이 어떻게 무등산에 의지해 살아가는지를 다각도에서 살펴본 기획 기사로서 총 20회 분량으로 실렸다. 박 선생의 이 글은 기획물 마지막회분 '유명 인사의 등정기'편에서 '인간 무등산','무등산 박물관'으로 알려진 박 선생의 글을 받은 것이다. '당신에게 무등산은 무엇인지'를 물은 것에 대한 그의 답이었다.

 박선홍 선생은 1976년 초판을 낸 뒤 30여년 넘 도록 수정·보완과 첨삭을 게을리하지 않은 무등산 사랑의 결정판인 '무등산(다지리)'일곱번째 증보판을 2008년 12월 펴냈다. 이 전인미답의 역저 '무등산'은 무등산의 유래, 전설, 명승 등을 총정리한 인문지리서여서 연재물의 훌륭한 참고 문헌이 됐다 . 기자가 알지 못한 것과 경험하지 못한 무등산 관련 옛 이야기는 선생의 책에서 발췌한 내용이 기사에 반영됐다. 무등산은 백제시대까지 '무돌산','무당산'으로 불렸고, 고려시대 이후 현재의 명칭이 된 것도 이책을 통해 알게 됐다. 박선홍 선생은 일제 강점기부터 광주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고 이를 체계화한 광주지역 향토사 연구의 거목이기도 하다. 그는 1987년부터 20년 동안 '광주민학회'를 이끌며 문화유산답사와 지역문화 전수에 앞장 섰고 ,그 결과물이 1994년 펴낸 책 '광주100년'이다. '광주학'이라고 할 정도의 학문적인 깊이와 전문성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선생은 노환으로 2017년 8월 9일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광주사랑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를 것으로 보인다. 최근 광주문화재단은 혜운 박선홍 선생추모 5주기를 맞아 광주학과 광주문화자산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 광주학술상을 제정하기로 했다고 밝혀서다.이번 학술상은 유족들이 선친의 뜻을 기리고 지역학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10년간 학술상 상금 5000만원을 쾌척해 마련돼 의미가 남다르다.광주학술상 수상자는 광주 지역학 연구를 활성화하는데 노력한 공로가 있는 인물을 대상으로 선정되며, 수상자에게는 상금 500만원과 학술도서 발간 지원이 이뤄진다. 박선홍 선생의 선각자적 삶은 서산대사의 시 '답설'의 실천과 다름 아니란 생각을 갖게 한다.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不須胡亂行(부수호란행),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눈덮인 들판을 밟으며 지날때면/발걸음을 모쪼록 어지러이 말아라/오늘 내가 남긴 이 발자국은/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라/

"이젠 내 나이 팔순이 됐으니 이젠 무등산을 기록하는 일은 젊은이들이 해야 하네" 라고 무등산 취재 당시 하신 선생의 말씀이 떠오른다. 이기수 수석논설위원 .



이기수 기자 kisoo.lee@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