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9월 08일(수) 14:50 |
황대중, 두 다리를 절다
황대중(黃大中, 1551~1597)의 호는 양건당(兩蹇堂)이다. 양건당의 '건'은 '절다'라는 뜻이니, 양건은 두 다리를 절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두 다리를 절게 된 사연이 기가 막힌다.
황대중이 왼쪽 다리를 절게 된 것은 그의 지극한 효성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 강씨가 학질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황대중은 자신의 왼쪽 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니의 약으로 쓰게 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된다. 이후 사람들은 황대중의 효성에 감복하여 그를 '효건(孝蹇)' 즉, '효성의 절름발이'라 불렀다. 황대중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의 효심이 알려져 십리 밖까지 조문객의 행렬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그의 효성이 조정에 전해지자, 임금은 정릉참봉 벼슬을 내리지만 거절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그가 찾아간 곳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본영이 있는 한산도였다. 그는 이순신의 군관이 되었고, 이순신과 함께 함대를 이끌고 순찰에 나섰다. 그리고 거제도 앞바다를 지나다 왜군이 쏜 조총에 오른쪽 허벅지를 맞는다. 이순신은 대중의 다리를 어루만지고 탄식하면서 "옛날은 효건이었는데, 오늘은 또 충건(忠蹇)이구나!" 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황대중을 "한 다리는 부모에게, 또 한 다리는 나라에 바쳐 다리를 절게 되었다"며, 양건(兩蹇)이라 부르게 된다.
이순신의 군관이 되어 곁을 지키다
두 다리를 어머니와 나라에 바친 양건당 황대중은 유명한 황희 정승의 5대손으로 1551년 한양에서 아버지 윤정과 어머니 진주 강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어릴 적 이름은 유(萸)였고, 고친 이름이 대중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했고 문장에 뛰어났다고 한다. 황대중은 영암군수로 있던 조부 황응을 따라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구상리로 내려왔고, 이후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게 된다. 황대중이 남도땅 강진과 인연을 맺은 이유다.
임진왜란은 그에게는 운명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뒤 일본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황윤길이 그의 친척이었고,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청병사 황진은 그의 6촌형이었다. 이순신과도 각별한 사이였다.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던 이순신을 보성관에서 만난 인연을 맺은 적도 있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정은 도승지 이항복의 제안을 받아들여 8도에서 무예가 뛰어난 인물들을 모집하였다. 별초군(別抄軍)이 그것이다. 전라도에서도 별초군을 뽑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황대중이 아니면 누가 별초군이 될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는 전라도 별초군 80명에 뽑혔고, 별초군의 우두머리를 맡게 된다. 그는 80명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 의주로 피난가는 임금을 모시고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호위했다.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자, 그에게 내려진 임무는 이여송의 명군을 안내하는 일이었다. 그는 전도비장(前導裨將)이 되어 남하하다 문경새재(조령)에서 충청도 병마사인 6촌 형 황진을 만났고, 의령·함안을 거쳐 들어간 곳이 진주성이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7년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지속되었다. 10만에 가까운 일군을 수천의 관군과 의병이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8일 충청병사 황진이 순국하고, 이튿날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 전라도 의병장들은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다. 황대중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찾아간 곳은 2년 전 보성관에서 만난 이순신이었다. 당시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은 전라도를 지켜내기 위해 전라좌수영의 본영을 한산도에 전진 배치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황대중은 이순신의 휘하에서 순찰 도중 오른발에 왜군이 쏜 총을 맞아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이순신 곁을 지킨다.
1597년(선조 30), 이순신은 왜군이 거짓으로 꾸민 밀서를 그대로 믿은 조정에서 출전 명령을 내렸지만 응하지 않았고, 조정은 이를 구실로 이순신을 파직한다. 이어 원균이 3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그러나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칠천량 전투에서 궤멸되자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교지를 받은 것은 8월 3일 경상도 진주 손경래의 집이었다.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곧장 전라도 땅 구례로 향했다. 이때 군관 9명과 병사 6명이 이순신을 호위했다. 그 군관 중 한 명이 황대중이었다. 이순신이 가장 힘든 시기, 황대중은 이순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남원성에서 순국하다.
황대중은 3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을 보좌하고 8월 3일 구례, 4일 곡성, 5일 옥과에 이르렀다.
옥과에 머무르고 있던 8월 6일 "남원이 위급하니 군영마다 제일 뛰어난 군관 한 명을 선발하여 보내라. 수군에서는 황대중을 보내라"라는 체찰사 이원익의 문건이 도착한다. 이순신은 난감했지만, 군령을 어길 수 없었다. 황대중이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과 이별한 후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부대에 합류, 남원성에 도착한다.
8월 12일부터 왜군 5만 8천여 명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해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1,000여 군사와 명나라 부총관 양원의 3,000여 군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16일 남원성은 함락되고 성민 6,000여 명을 포함한 1만여 명이 혈전 분투하다 장렬하게 순절한다. 그 속에 황대중도 포함되어 있었다. 옥과에서 이순신과 헤어진 지 10일 만이었다.
그가 쓰러지자 왜군은 그의 호패를 찾아내고, 비단을 찢어 '조선 충신 황대중'이라 써 그의 시신 곁에 나무를 세워 글씨를 건다. 그는 왜군마저 인정한 충신이었다. 왜군이 물러가자 대중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주부 김완이 달려왔다. 대중은 김완에게 "나의 시체를 거두어 말에 실어서 집에 보내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말은 300리를 달려 강진 구상마을에 도착하였고, 부인과 19살 아들 정미(廷美)가 달려나와 시신을 붙잡고 목놓아 운다.
이순신도 황대중의 순국 소식을 접하고 슬픔에 빠진다. 이순신은 완도 고금도에 본영을 정한 그해 12월 4일 황대중을 애도하는 글을 짓고 제사 음식을 마련하여 사람을 보내 술을 올린다. 이순신이 얼마나 황대중을 아꼈는지를 알 수 있다.
현장을 찾다
양건당 황대중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 구상마을을 찾아야 한다. 마을 입구에는 그를 기리는 충효정려비각이, 마을 뒷산에는 그의 무덤이, 마을 앞에는 그의 시신을 날랐던 말의 무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황대중은, 왼쪽 다리는 어머니에게 오른쪽 다리는 나라에 바쳤으니, 충·효를 실천한 충신 효자가 아닐 수 없다. 그를 기리는 충효정려각은 담장으로 둘러쳐 관리되고 있었다. 담장 안의 소나무와 배롱나무가 일품이다. 소나무 옆에는 '양건당장수황공휘대중충효추모비(兩蹇堂長水黃公諱大中忠孝追慕碑)'가 서 있다. 그리고 충효문을 지나면 한칸짜리 팔작지붕의 정려각이 나오는데, '兩蹇閭(양건려)'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정려각 안에는 '충신효자 행정릉참봉황대중지려(忠臣孝子行貞陵參奉黃大中閭)'라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각은 1795년(정조 19)에 건립한 것이니, 그의 사후 198년이 지난 후였다. 정려각이 세워진 이후 또 226년이 흘렀으니, 양건당 황대중은 정려와 함께 또 영원히 살고 있는 셈이다.
정려각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논 가운데에 황대중의 두 다리가 되어 준 애마를 묻은 무덤이 있다. 무덤의 규모도 놀랍다. 무덤 앞에 비를 세웠는데 '양건당애마지총(兩蹇堂愛馬之塚)'이다. 비 기단부에는 말도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무덤 옆에는 말에 탄 황대중의 동상도 서 있다.
말의 무덤은 말에 대한 주인의 최대 예우다. 1597년 8월 16일 황대중이 남원성에 전사하자, 김완이 그의 시신과 유품을 말에 실었고, 말은 300리 길을 밤낮으로 달려 강진 구상마을에 도착한다. 주인의 장례가 치러지는 3일 동안 마굿간에서 식음을 전폐하다 주인을 따라 세상을 뜬다. 양건당 황대중의 다리가 되어준 말이 죽자, 황대중의 가족들은 말의 충심에 감동하여 주인이 묻힌 묘에서 바라보는 자리에 무덤을 만들어준다. 4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지금도 묘는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말과 주인과의 믿음과 신뢰가 400년이 지난 지금도 감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