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영암 모정마을
2021년 07월 01일(목) 16:44

모정마을-겉보기에 전형적인 농촌이다. 하지만 속은 전통이 깊은 마을이다. 이돈삼

나도 모르게 '순간이동'을 한다. 어렸을 때, 수박 서리의 현장으로.

달빛마저도 흐릿한 여름날 밤이었다. 친구들과 모여서 산자락에 있는 수박밭으로 향했다. 밭이랑을 따라 슬금슬금 기어가서, 수박 한 덩이씩 얼른 따서 들고 오는 것이다. 크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평소 숙련이 된 덕이었다.

혹여 밭주인이 눈치를 채고 "어떤 놈들이냐?"고 목소리를 높이며 달려들 땐 줄행랑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수박 한 덩이를 옆구리에 끼고 도망쳐 나올 때엔 스릴마저 느껴졌다. 그 수박은 더 맛있었다. 꿀맛, 그것이었다.

수박과 참외 서리뿐 아니다. 깊은 밤에 토끼와 닭·오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왔던 기억도 소환한다. '거사'를 함께 했던 일행에는 밭이나 동물의 주인집 아들이 끼어있기 일쑤였다.

수박 서리를 주제로 한 벽화 앞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멈춘 이유다.

영암군 군서면 모정마을에서다. 벽화에서 마을의 내력과 역사도 엿보인다.

1540년 나주목사 임구령이 마을 앞의 갯벌을 막고 제방을 쌓아 간척지를 조성했다. 큰 언덕 아래에는 연못을 팠다. 연못에 연꽃을 심고, 한쪽에 정자도 지었다. 정자의 이름을 모정(茅亭)이라 이름 붙였다. 허름한 집에 살며 사치하지 않은 요나라 임금의 검소함을 기리는 고사 '모자불치(茅茨不侈)'에서 따왔다. 모정마을의 지명 유래와 엮인다. 나중에 정자를 고쳐서 짓고, 이름을 '쌍취정'으로 바꿨다.

간척지를 만든 임 목사는 연못 아래에 약간의 논을 갖고 있었다. 그의 후손들이 논을 팔고 이사를 갔다. 하지만 '농지는 팔았는데, 연못은 팔지 않았다'며 다툼이 생겼다.

벽화-모정마을의 내역과 역사를 담장벽화로 그려 놓았다. 이돈삼

1857년 전라관찰사 김병교가 양쪽의 주장을 듣고 판결을 내렸다. 요지는 '답궤관수 언실속중(沓樻灌水 堰實屬衆)'이었다. 논은 물과 이어져야 하며, 연못은 마을주민들의 것이라는 판단이다. 마을주민들이 고마운 마음을 담아 철로 만든 김병교 송덕비를 세웠다. 원풍정(願豊亭) 앞에 송덕비가 있다.

김구해(1718∼1799)가 흉년 때 쌀 60석을 내놓아 군서주민 600가구를 구휼했다는 이야기도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그의 빈민구제 소식을 듣고 임금이 1784년 특별히 감사의 편지를 내렸다는 내용이다. 이웃이 어려울 때 서로 돕는 품앗이와 주민화합 전통의 뿌리가 깊음을 알 수 있다.

벽화를 보며 마을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10여 년 전, '참 살기 좋은 마을'로 선정돼서 받은 지원사업비로 그려진 그림이다. 그림도 우리의 정서와 잘 어우러지는 한국화여서 더욱 친숙하게 느껴진다. 벽화의 거리는 마을의 한가운데 길을 가로지르고 있다.

모정마을은 월출산 자락 구림마을과 가깝다. 마을에서 국립공원 월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과 맞닿은 큰 연못에 월출산이 반영돼 비치고, 넓은 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16만㎡나 되는 모정저수지에는 홍련이 가득하고, 호숫가를 따라 둘레길도 나 있다.

마을에 삼효자 문도 있다. 송죽 김익충 후손의 대를 이은 효를 기리는 공간이다. 4대손 김예성(1698∼1777)과 6대손 김기양(1756∼1826), 7대손 김재민(1769∼1846)의 효가 입소문을 탔다. 순종이 세 효자에게 벼슬을 추증하고 효자문을 세우도록 했다. '세현문(世顯門)'과 '사권당(思勸堂)' 현판 글씨를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이 썼다.

벽화의 거리에서 나와 마을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김병교 관찰사의 공덕을 기리는 철비가 원풍정 아래에 세워져 있다. 원풍정(願豊亭)은 풍년을 부르는 정자다. 모정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팽나무 그늘 아래에 원풍정과 철비가 있다. 마을 앞 들녘에서 보면 모정저수지 한쪽의 절벽 위다. 월출산 천황봉 위로 떠오르는 해돋이와 서해로 떨어지는 해넘이를 보는 장소로 맞춤이겠다.

풍년을 부르는 원풍정-노거수 팽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돈삼

마을회관에서 가까운 쌍취정과 망월정의 전망도 수려하다. 쌍취정은 1558년 석천 임억령과 그의 동생 임구령이 지은 정자다. 쌍취는 두 형제를 가리킨다. 눈을 들면 월출산과 군서들이 들어오고, 발 아래로 모정저수지가 펼쳐진다. 사권당, 돈의재, 선명재, 월인당 등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집도 많다. 광산김씨 문각인 사권당은 세 효자를 기리는 집이다. 돈의재는 평산신씨 문각이다. 옛 서당 건물인 5칸 한옥의 선명재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월인당은 전통찻집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되고 있다. 벼락 맞은 이팝나무가 마당에서 눈길을 끈다. 옛날에 배의 줄을 묶어놓는 지주 역할을 하던 나무다. 간척되기 전까지 마을 앞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이었다. 이팝나무는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다.

장성한 이팝나무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모셔졌다. 주민들은 이팝나무의 하얀 꽃이 활짝 피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한테 쉼터를 제공했다. 하지만 1930년 여름 천둥과 함께 떨어진 벼락을 맞고 '반쪽'이 됐다. 그 모습까지도 애틋한 이팝나무다.

모정마을은 여느 농촌과 달리 젊은 마을에 속한다. 30~50대가 전체 100여 가구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어린이들의 웃음소리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주민들의 단결과 풍년을 기원하는 모정줄다리기는 마을의 자랑거리다. 남도문화제에 영암군 대표로 참가해 우수상을 받았다. 가야금명인 한성기 생가도 있다. 한옥 20여 동이 모여있는 한옥행복마을도 멋스럽다.

녹색농촌체험마을, 한옥형 반찬사업 대상마을, 참 살기 좋은 마을, 종합개발사업 대상마을 등으로 선정됐다. 전남마을숲 가꾸기 경연에서 대상도 받았다. 숲에 마을의 문화와 역사를 입힌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풍경 아름답고, 활력이 넘치는 마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주민들의 자긍심도 높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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