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광장·이기언> 잊혀진 열사, 고등학생 김철수
이기언 광주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 연구원·교육학 박사
2021년 05월 31일(월) 12:42 |
![]() 이기언 광주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 연구원·교육학 박사 |
1991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김철수 열사는 전라남도 보성고등학교 학생이었다. 5월18일 보성고에서 학생회 주최로 열린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도중 '참교육 실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했다. 김 열사는 중화상을 입고 치료를 받았지만 6월 2일 숨을 거뒀다.
김철수 열사는 마지막 유언으로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자기만을 위한 사회 만들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로봇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취급을 받느니 지금의 교육을 거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진실한 삶인지 생각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정의가 커져 넘치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열사의 죽음 이후 30년이 지났고, 수많은 열사들의 희생은 시민들의 촛불혁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철수 열사의 죽음은 정체기를 겪었던 고등학생들의 사회 참여를 이끌어낸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후 학생회 조직 구성과 동아리 활동이 활발해졌고, 청소년 운동의 지평을 기득권에 대한 저항으로 넓히고 새로운 변화를 선도하며 정책을 제시하는 역할로 변화시켰다.
김철수 열사는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고 보성고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등학생이었던 김철수 열사는 점점 잊혀져가고 있고, 열사가 죽음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교육 현장과 사회는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여전히 우리나라 교육의 중심에는 학생들의 삶을 위한 교육이 아닌 '입시'와 '서열'을 위한 교육이 자리하고 있다.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기회보다는 이미 결정된 것에 따라가는 것이 더욱 쉽고 익숙하다. 학생은 아직 미성숙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필자는 학생운동의 경험이 없다. 김철수 열사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십여 년 전이고, 학생운동과 그와 관련한 역사들도 이즈음에 접하게 되었다.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던 이유를 대자면 여러 가지이겠지만, 마음 한켠이 항상 무겁고 아픈 것은 사실이다.
아직도 변하지 않는 교육 현장을 바라보고 있자면 학생이었던 필자가 적극적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행동하지 못했던 것 때문은 아닌지 자책감도 든다. 이는 80년 5월 광주와 함께 하지 못한 이들이 느끼는 감정이나 의식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과 생각만으로 아픔을 공유하는 것은 당시 함께 행동하지 못했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사소한 것이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열사의 뜻을 이어가는 일이 될 것이다.
2017년 김철수 열사가 분신한 보성고 교정에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이날 추모비 제막식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가 91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 현실과 교육 현장의 모습을 변화시키자는 의지를 다졌다. 특히 그날 보성고 학생회장의 추모사는 더욱 뭉클하였다. "선배님과 약속합니다. 저는 잘못된 것을 바로 세울 줄 알고 먼저 나서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역사적으로도 많이 배워 지혜로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김철수 열사는 우리나라 모든 학교가 인간적인 교육의 장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고 '후세대인 우리들을 믿는다'는 유언을 남겼다. 교육을 통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인격체가 되기 위해 학생이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교육, 그런 교육이 일상이 되는 학교와 사회의 모습이 바로 '참교육의 불꽃' 김철수 열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필자가 김철수 열사를 추모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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