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통금 시대
김성수 정치부장
2021년 05월 05일(수) 14:00 |
![]() 김성수 정치부장 |
초등학교도 아닌 국민학교를 막 다닐 무렵 쯤이었을까. 1970년대 초중반 출생자들은 자정이 되면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바로 야간 통행금지(통금). 밤에 허락받지 않은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표면적인 목적은 치안 유지였지만, 이 정책 때문에 통금이 시행된 약 36년간 국민들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권리를 제약받았다.
야간통금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 성의 문을 보통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닫고 통행을 금지했다. 조선시대 통금은 매우 엄격했고, 고위직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의 통금은 1895년(고종 32년) 해제됐다.
야간통금은 1945년 9월 7일 다시 부활한다. 당시 미국의 포고령에 의해 실시되고 1982년 1월 5일 5공시절 3S(SEX, SCREEN, SPORTS)정책의 일환으로 대부분의 지역에서 야간통금이 해제됐다. 해제 당시 사람들이 새벽 1시에 길거리에 나와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나이 불문 전 연령 층이 통금 대상이었다. 이를 어겼을 경우 거동 수상자로 곧바로 체포해 파출소 등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대다수 훈방조치됐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끌려가 부랑자라는 오명을 쓰고 대한청소년개척단 같은 국가폭력의 희생양이 된 사례도 있었다.
억압의 상징이었던 야간통금이 2020년 다시 소환됐다. 광주·전남은 그해 12월께 '5인 이상 집합금지' 및 '21시 이후 영업제한' 발표로 일명 '코로나 통금'을 선언했다. 코로나19 확산탓이다. 영업제한 대상과 제한시간 조정도 있었지만 코로나19 확진자가 끊이지 않으면서 코로나 통금도 장기화 되고 있다.
5개월째 이어진 코로나 통금은 일상을 바꿔놨다. 회식이 없어지고 개인 시간이 늘어 좋다는 직장인도 적지 않다. 귀가 시간은 빨라졌고, 2차·3차 모임은 옛말이 됐다. 하지만 일부 도심 번화가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넘쳐난다. 일부의 일탈로 유흥업소 등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쏟아지고 있다. 사생활 침해 등의 개인의 자유도 중시돼야 하지만 코로나 통금은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임을 명심해야 한다.
김성수 기자 sskim@jnilbo.com seongsu.kim@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