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없는 세상에서 응시하고 저항하는 시의 향연
이산하, 22년만에 신작 출간
2021년 02월 18일(목) 14:48
악의 평범성

이산하 | 창비 | 9000원



20대의 문학청년이 목격한 '제주 4·3항쟁'의 진실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시를 쓰고 발표를 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으로 옥고를 치러야 했던 엄혹한 시절을 통과하며 시인은 노년을 맞이했다. 자신이 맞닥뜨렸던 불의와 불합리, 부정의 세상은 한결 보드랍고 온화하고 민주적인 표피를 보이지만 양상과 방식을 달리해 여전한 불의와 불합리와 부정 투성이다.

제주 4·3항쟁의 진실을 폭로한 장편서사시 '한라산'으로 옥고를 치르고 긴 시간 절필 끝에 두번째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1999)를 발표했던 이산하 시인이 22년만에 신작 '악의 평범성'을 출간했다. '적'의 정체가 분명했던 시절에 격렬히 저항했고 그로인해 안팎으로 상처를 입으며 벼렸던 시인의 날 선 시선과 감성은, 겉으로는 안온한 일상으로 포장된 오늘날의 '적'을 만나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켜 어떻게 다시 빛을 발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편들로 빼곡한 시집이다.

광주항쟁의 피해자를 비아냥하고, 세월호사건 피해 학생을 조롱하는 듯한 SNS의 글에 환호하는 이들이 '모두 한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임을 알기에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 다른 나'라는 사실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악은 결코 비범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하기에 어쩌면 더 악랄해지고 지독해졌으리라. 이런 악을 양산하는 사회구조는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노동을 천시하는 변질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기반으로 한다. '자본주의는 위기때마다 새로운 가면을 쓰며 폭주하고 있다/ 맑스의 자본론이 오히려 예방주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시인의 통찰에 눈이 번쩍 뜨이는 이유다.

시인은 자신을 찍을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겠다는 '나무'의 자세로 시를 썼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는 이번 시집은 아직도 열렬하게 살아있는, 저항하는 시 정신의 향연이다.

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