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민한의 동시대미술 수첩>동시대미술의 눈으로 풍경화를 논하다
장민한 (조선대 시각문화큐레이터 전공 교수)
2021년 02월 07일(일) 13:49

류재웅-월출산-천황봉에서, 2019, 80x200cm, Oil on canvas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더욱미술생활>이라는 이름으로 G&B갤러리 이전 기념 개관 전시(2.9.~4.12.)가 열린다. 광주시립미술관과 전남도립미술관에서 풍경을 그리는 중견 작가 각각 7명씩을 추천하였다. 유화, 아크릴 등을 사용한 풍경화뿐만 아니라 전통 매체인 먹과 종이를 사용한 산수화도 함께 전시된다. 이번 기회에 오늘날 제작된 풍경화가 어떤 예술적 가치를 지닐 수 있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아름다운 장면이나 풍경을 좋아한다. 스마트폰의 발달로 누구나 쉽게 간직하고 싶은 장면을 찍고 간직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스마트폰 앱 덕분에 실제 눈으로 본 장면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장면이 찍혀서 깜짝 놀라기도 한다. 이런 첨단 과학 시대에 작가가 엄청난 시간과 노고를 들여서 풍경을 직접 그린다는 것이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요새 말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 아닐까?

19세기 사진기가 발명되고 누구나 쉽게 사진기를 사용하기 이전까지는 풍경을 그리는 작업은 상당히 가치 있는 활동으로 평가를 받았다. 영국 비평가 존 러스킨이 말했듯이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과 묘사를 통해 신의 질서와 의미를 찾아내는 행위로 평가받고 있었다. 서구에서 풍경이 사건이나 인물의 배경 이미지로 취급받다가 풍경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16세기부터이다.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풍경화가 하나의 독립적인 미술 장르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당시 풍경화는 진리를, 즉 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거울로서 간주되었다. 풍경화에서 보이는 아름다움은 진리의 은유이자, 하나님의 의지와 전지전능한 능력을 구현한 자연의 완벽함이라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 시기에는 풍경화는 자연의 완전성과 조화로움을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무한한 세계에 대한 경외감을 나타낸다. 이 시기에는 새로운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세계의 외피만 볼 뿐이고 신이 만든 실제 모습은 우리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세계관을 갖게 된다. 단지 천재 미술가의 상상력과 직관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 시대의 풍경화는 세계 자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알 수 없는 세계, 즉 덮개 밑에 숨겨진 무한한 실재를 상상하게 만드는 힌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 그려진 하늘, 바다, 산, 폭풍 등은 무한한 실재를 감상자가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드는 수단으로 작동된다.

19세기 과학이 발전하고 이에 따라 산업과 도시가 발전하면서 미술가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했다. 이때 등장한 사조가 바로 인상주의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실증주의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인상주의자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의 모습은 단지 빛의 반사에 불과하다는 광학적 지식을 풍경화에 적용하려고 했다. 그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모습을 화면에 옮겨놓으려고 했다. 그들은 대상의 모습이 아니라 대상의 빛을 잡아냄으로써 세계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내려는 서구 미술 600년 동안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서구의 풍경화는 각 사조에 따라 그 목표와 양식이 다르지만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태도가 있다. 주체와 대립하고 있는 세계가 따로 있고 이 세계의 원리를 그려내려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산수화'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한국 전통 풍경화는 주체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는다. 이것의 기본적인 특징은 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원리를 찾지 않고, 세계에 작가 심상을 투사한다는 점이다. 서양 풍경화가 세계를 바라보는 창의 역할을 했다면 한국 산수화는 마음의 창이 된다. 산수화에서 풍경은 실제의 풍경이 아니라 내면의 풍경이고, 객관 세계와 무관한 작가의 이상향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18세기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등장하면서 산수화에서도 자연의 관찰이 중요하게 되었다. 선배 화가의 화집이나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연을 답사하고 그것을 화폭에 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물의 외적인 형태보다도 자연의 원리를 그리려고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닌 자연의 재구성과 변형을 통해 화가 자신이 파악한 자연의 기운생동을 나타내고자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풍경화란 눈에 보기 좋은 자연의 외관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풍경화와 우리 전통 산수화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전자는 인간과 대립하는 세계가 있고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고방식, 후자는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사고방식이 풍경화의 형식에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동시대미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가 작가와 관람객 사이의 효과적인 소통이라고 한다면, 작가 자신의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풍경화는 여전히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풍경을 통해 작가가 나타내려는 세계관은 무엇인가? 작가는 이것을 어떤 양식으로 보여주고 있는가? 더 나아가 이것이 성공적인지 성취되었는가? 그리고 이것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풍경화를 감상한다면, 어떤 다른 장르의 미술 전시보다 더 유익한 통찰과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신 바라본 세계에 대해 자신만의 시각이나 감정을 투사하려는 작품들이다. 류재웅, 양해웅, 이구용, 장안순, 조용백, 한임수, 한희원, 황순칠 작가이다. 이들은 주로 자신이 파악한 자연의 원리, 혹은 자신만이 느낀 정취를 풍경 속에 나타내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나타내려는 심상에 상응하는 풍경 이미지를 화면 속에 구성하려는 시도이다. 김대원, 박성환, 박태후, 이지호, 정선휘, 조근호 작가는 각각 자신이 느낀 감흥에 상응하는 내적 심상을 화폭에 구성하고 있다. 양자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이미지를 제작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풍경 이미지를 통해 작가 자신의 시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는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풍경화가 미술사적인 의미를 지니려고 한다면 선배 화가들과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오늘날 풍경화도 전통과 혁신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장민한 (조선대 시각문화큐레이터 전공 교수)

김대원, 중력같은 이끌림, 2019, 200X70, 한지에 수묵채색

박성환-밤 65X53cm oil on canvas 2016

박태후, 자연 속으로, 2019, 190X256, 한지에 수묵담채

양해웅-옥적사파리1, Acrylic on Piywood, 122x73cm, 2020, 1천만원

이지호-사랑이 꽃피는 마을, Acrylic on canvas, 120×90cm. 2018.

장안순-만 (灣) 정화-치유

정선휘, 삶속의 풍경, 2020, 95X122, 합판 위에 물감(LED)

조근호, 도시의 창, 2020, 90.9X116.7, 캔버스에 유채

조용백-달사만종 140x90 한지+수묵 2020

한임수-붉은갯벌2019-10 100x100 oil on canvas 2019

한희원, 영산포에서, 2014, 46X95, 캔버스에 유채

황순칠, 푸른 絶壁 아래 坐佛과 멀리 7층 탑이 보이는 눈세상, 2016~2021,80.3x130.3cm, 캔버스에 유채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