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7>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⑧ (完) 운주사 석탑 마름모 문양은 금강경과 몽골 천막 게르 뼈대 상징
2020년 09월 27일(일) 15:14

1. 운주사 석탑 문양 모음('운주사종합학술조사', 전남대학교 박물관, 1991.)

운주사 석탑 문양의 비밀

운주사 석탑의 몸돌에 표현된 기하학적인 문양은 어떠한 의미이며 무엇을 상징할까? 운주사 석탑에 새겨진 '마름모'(◇,□), '×' 교차(×, ××), '수직사절'(⟩|||||||⟨) 등의 문양은 우리나라 석탑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문양의 형태를 유심히 살펴보니 기본적인 도형은 마름모(◇)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냥 '◇'를 새기거나 '×'자를 중첩해서 마치 몽골전통 가옥인 천막집 게르(Ger)의 뼈대처럼 연결한 문양도 발견된다.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생각해 오던 것을 인도의 힌두교(불교) 사원 외벽에 장식된 다양한 형태의 마름모(◇) 문양을 보면서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 문양의 덫에 빠져 헤매던 생각이 분명하게 정리된 것이다.

마름모 문양은 금강석을 상징

마름모 문양은 티베트 최고의 경전인 '사자死者의 서書'(죽음의 순간에 단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해탈에 이른다는 경전)의 표지나 티베트 사원(포탈라궁 자수 천 문양, 드레풍 사원 창살문)에서 발견되는 중첩된 마름모 문양, 인도의 힌두교(불교) 사원의 외벽에 빽빽하게 장식될 정도로 중요한 신앙적 도형이며 금강석金剛石(diamond)을 상징한다.

불교의 최고 경전은 '금강경'으로 금강석과 같은 지혜로 모든 고통의 고리를 끊어야만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았다. 다이아몬드를 처음 사용한 민족은 인도의 드라비다족으로 BC 7∼8세기의 일이다. 18세기 초에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기까지 인도가 유일한 다이아몬드 산출국이었다. '사자의 서'의 표지나 티베트 사원(포탈라궁 자수 천 문양, 드레풍 사원 창살문)에서 발견되는 중첩된 마름모 문양과의 유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러한 석탑의 건립은 마름모꼴을 중심으로 표현된 문양과 더불어 운주사 천불천탑 신비를 밝힐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인 셈이다.

마름모의 광채와 빛줄기 표현

마름모의 가장 분명한 조형 사례를 포함해서 그동안 '×'나 '××' 무늬가 선명한 까닭에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무늬처럼 네 면에만 국한하지 않고 측면까지 고려하면 모두 마름모를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로 해석된다. 운주사 5개 문양 탑에는 마름모 문양을 구현하려는 최종 목적 외에도 몇 가지 일정한 형식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중첩된 마름모(□) 무늬는 마름모(□) 안의 사엽(四葉)과 열십자(+)형 무늬와 함께 상층 옥개석 하면의 중첩된 '∨'자 문양과 더불어 하늘로 퍼져나가는 다이아몬드의 광채를 표현한 듯하다.

'×' 교차(×, ××) 무늬는 일반적인 빗살 문창살 무늬보다는 몽골 전통 가옥인 천막집 게르(Ger)의 뼈대에서 차용된 문양에 더 가깝게 여겨진다. 운주사에서 출토된 '범자진언 막새' 기와는 티베트의 후기 밀교가 성행한 원나라 간섭기(1259년~1356년)의 영향 속에서 성행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운주사 석탑에 새겨진 '×' 교차(×, ××) 무늬는 이제는 몽골 전통 가옥인 천막집 게르(Ger)의 뼈대에서 그 문양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주목되는 현상은 운주사 문양 탑들이 마름모 형태로 배치되었다는 사실이다. 문양 탑의 분포 형태는 3개의 탑을 축으로 좌우에 두 개의 탑을 배열하여 마치 마름모 도형처럼 보인다. 이러한 배치는 우연히 나올 수 없는 결과이며 탑신의 문양과 함께 그 특별한 의미를 배가시키는 상징적 장치로 이해된다.

운주사 연구, 발굴과 문헌 자료를 통한 진전된 성과

운주사의 실증적인 연구는 발굴을 통해 옛 절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절 초입 골짜기 입구 왼쪽 밭은 주변에서 많은 기와와 도자기 조각들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건물터로 예견된 곳이다. 발굴 조사한 결과 건물터는 세 층위로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기와나 도자기 조각 등의 출토 유물과 유구의 축조 구조를 종합해 볼 때 건물지는 하층이 고려 초, 중층은 고려 중기에서 후기, 상층이 조선 초기에서 정유재란 때(1597년)까지로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중창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하층과 중・상층 건물지는 축선이 15° 정도 틀어져서 발견되었다. 이는 하층 건물지가 폐사된 후 일정한 기간이 지나고 나서 중・상층 건물지가 들어선 것으로 이해된다. 상층 건물지에서 나온 '홍치팔년弘治八年(1495년)명 기와'에 등장한 시주자들은 洪氏・李氏・全氏・權氏・任氏・吳氏 정도가 판독되었다. 이들은 나주나 능주에 기반을 둔 지역 유력자들일 것이지만 천불천탑을 직접 조성한 세력과는 4백 년 정도의 시차를 보여 동일 집단에 의한 창사로 보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도 많다.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는 과연 위의 세 층 가운데 어느 층위에서 살던 이들이 천불천탑 조성하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하층인가? 중층인가? 아니면 하층이나 중층에서 시작하여 상층까지 계속 이어진 役事인가? 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상층은 불사의 시작이 아니라는 사실뿐이다. 불상과 탑에서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 모양의 차이가 이들 건물지의 층위와 일정한 관련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론만을 제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렇듯 운주사 석탑과 석불은 고려 초기냐? 중기냐? 말기냐? 하는 시기적 차이만 있을 뿐이지 고려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자세한 제작 시기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산비탈 저편에 자리한 칠성석을 주목해 봐야 한다. 이러한 칠성석의 지름 크기・배치 간격과 북두칠성 관측치의 비교 연구를 통해 운주사 천불천탑의 제작시기에 대한 천문학적 접근이 기대된다.

폐사지에서 출토된 '범자진언 막새기와'는 티베트의 후기 밀교가 성행한 원나라의 영향 속에서 등장한 역사적 산물이다. 특히 5개 문양탑의 기하학적인 도형인 이중마름모(□) 무늬는 마름모를 구현하려는 최종 목적과 더불어 사엽(四葉)과 열십자(+)형 무늬와 함께 상층 옥개석 하면의 중첩된 '∨'자 문양과 더불어 하늘로 퍼져나가는 다이아몬드의 광채를 표현하려는 현상이다. 이는 마름모 문양(다이아몬드)의 광채가 하늘로 퍼져나가는 듯한 디자인적 요소가 가미되었으며 칠성바위와 함께 별자리나 천문관념이 반영된 결과이다. 나아가 고려 시대에 성행한 도교의 칠성 신앙 영향 속에서 '칠성석'과 '운주사환은천조雲住寺丸恩天造'명 암키와'도 제작되었고 바로 이 세력들이 '천불천탑'을 조성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자료를 종합해 보면 금동불・보살상(8~9세기)을 소지한 전통적인 불교 세력이 고려 후기 원의 간섭기(1259년~1356년)인 13~14세기에 티베트 후기 밀교의 영향 속에서 '옴마니반메훔' 육자대명왕진언 수막새 기와와 '옴파람' 진언 암막새 기와를 만들어 건물 지붕에 장엄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고려 시대 성행한 도교의 칠성 신앙의 영향 속에서 '칠성석', '운주사환은천조'명 암키와, '석조불감'과 '상배석불相背石佛'도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성향의 승려집단이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조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폐사 경위와 조선 후기 19세기 중창

운주사의 폐사 시기에 대해서는 정유재란(1597년) 직후인 1600년대로 추정하는 발굴 결과가 맨 처음 등장하였다. '동국여지지'(1656년)에 '사구폐寺舊廢'라고 기술하였다. '금폐今廢'라는 표현 대신 기술된 '구폐舊廢'라는 용어는 자구字句의 표현상 좀 더 시간적 경과를 의미한다. 허백명조虛白明照(1593~1661년)가 1600년대 중반경에 운주사에 와서 천불천탑을 회고하는 시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폐사 시기가 50년 이상 경과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록은 발굴조사의 결과와 대체로 부합한다. 발굴조사에서는 옛 절터(용강리 건물지) 전역에 화재로 소실된 흔적과 함께 17세기 이후의 유물이 보이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정유재란 때(1597년) 일본군에 의한 방화로 폐사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것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능성과 화순에 진격했다는 '대동지지'(綾州 典故, 1864년)의 기록과 함께 이때 능주목 관아의 '봉서루鳳棲樓'가 소진燒盡되었다는 '능주목여지승람綾州牧輿地勝覽'(樓亭 鳳棲樓, 1895년경)의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의 약탈과 방화에 가까운 운주사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운주사는 정유재란(1597년) 직후부터 약 200여 년간의 폐사 기간을 거치다가 19세기부터는 마애불 아래의 대초리 건물지에서 또 다른 형태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설담자우雪潭自優(1769~1830년)의 '운주동불탑수리후雲住洞佛塔修理後 중건약사전권선문重建藥師殿勸善文'(1800년~1830년경)은 운주동雲住洞의 불탑을 수리한 후에 약사전을 중건한 기록을 남겼다. 이후 범해각안梵海覺岸(1820~1896년)은 운주동運舟洞을 기행한 뒤 작성한 시에 약사전과 불탑을 표현하였고 자서전에 '천불천탑능주千佛千塔綾州 운주동약사사運舟洞藥師寺'로 기술되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19세기에는 '운주사'를 계승하지 않은 세력에 의해 '약사암(사)'가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 사진으로 보는 운주사 불교 문화유산의 변화상

운주사의 옛 사진을 통해 몇 가지 유용한 정보들이 판독되었다. 원구형탑은 4층이 아니라 7층이었고 5~7층의 도괴 시점도 1917년 이후부터 1919년 사이로 추정되었다. 연화탑은 7층 탑신석의 존재로 보아 최소한 칠층석탑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허물어진 원반형 삼층석탑(석주형 탑신석 3, 탑21)과 '마' 석불군의 대형석불입상의 존재도 1910년대의 사진을 통해 확인했다. 아울러 1930년대 중창 당시의 모습과 1967년 이후 증・개축 상황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을 통해 운주사의 풍경과 불적 배치 상황 등 20세기 운주사의 변천 과정이 한눈에 잘 드러난다.

운주사, 그 영원한 미스터리

'운주사'와 '천불천탑'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이 정도의 대형 불사가 관찬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역성혁명을 일으키려는 어떤 집단적 항거 유적지를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이 시점에서의 정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전통적인 불교의 토대 위에서 밀교와 도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승려집단들이 새로운 지지기반을 얻기 위해 기성 불교계로부터 소외된 민중의 정서를 빌리고 나아가 나주 남평이나 화순 능주의 드넓은 평야와 나주 영산포의 해상에서 경제적인 기반을 형성한 세력들을 끌어들였을 가능성은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경제력(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한 세력들의 조바심으로 다량의 석불과 석탑을 짧은 기간에 조성해야 하는 심리적・물질적 압박에 따라 '도중수천徒衆數千'(수천 명의 무리)의 석공(민중)들의 토속적인 심성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건 아닐까?

600년간 당당한 신앙 공간

운주사는 어디 한 군데도 명쾌한 구석이 없다. 칠성바위만을 본다면 도교적 성격이 드러나고 '범자진언' 암수막새로만 보자면 티베트불교・몽골과의 친연성도 읽힌다. 그렇다고 해서 별똥별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어서 고려 시대의 보편적인 시대 미감이 충분히 고려된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처럼 운주사는 한마디로 정의하거나 섣불리 속단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우리를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비록 '운주사'는 '천불천탑'을 다 완성하지 못했어도 11세기 이전부터 정유재란(1597년) 때까지 600여 년 동안 상당한 규모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당당한 신앙 공간이었다. 13~14세기에 이르러서는 몽골 불교와 도교의 영향으로 '천불천탑'이 조성되었다. 어쨌든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은 그 거친 석질로는 더 이상의 조각 솜씨가 발휘될 수 없는 최선의 조형물로 조화를 이룬 도량인 점만은 분명하다.

2. 몽골천막 게르(사진 인터넷 블로그)

3. 몽골천막 게르 내부(사진 인터넷 블로그)

4. 티베트 포탈라궁 ◇ 문양(사진 인터넷 블로그)

5. 티베트 드레풍 ◇ 문양(사진 인터넷 블로그)

6. 운주사 원구형 7층석탑('조선고적도보' 6권, 1917년)

7. 운주사 원구형 7층석탑 5~7층 도괴 모습(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9년 촬영) )

8. 운주사 원구형 7층석탑(사진 황호균)

9. 운주사 원구형 7층석탑과 추수하는 모습(사진 요헨 힐트만)

10. 홍치팔년명 기와(사진 유남해)

11. 원형 다층석탑 7층 탑신석 모습(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4년 촬영)

12. 도괴되기전 원반형 3층석탑('조선고적도보' 6권, 1917년)

13. 도괴된 후 원반형 3층석탑(사진 황호균)

14. 1800년대 설담자우 석탑 재조립 대상('조선고적도보' 6권, 1917년)

15. 운주사 '마'석불군 훼손되기 전 모습(조선고적도보' 7권,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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