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수경>고흥 절이도해전을 역사에 새기다
이수경 지역유산연구원장·문화재학 박사
2020년 08월 19일(수) 13:27

이수경 지역유산연구원장·문화재학 박사

고흥에서 만나는 충무공 이순신의 이야기이다. 오늘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지휘한 절이도해전 승첩 422주년이 되는 날이다.

절이도해전은 정유재란 때인 1598년 8월 20일(음 7월 19일, 이하 음력 표기) 전라남도 고흥의 절이도[거금도] 부근의 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적선 100여 척을 맞아 50척을 격침하여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조선 수군은 1598년 2월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하였고, 일본군은 순천 왜성을 거점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진린이 이끈 명나라 수군은 7월 16일에 고금도 진영에 합류하였다. 이순신은 18일 적선 100여 척이 녹도 방면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과 진린은 연합함대를 이끌고 금당도 인근 바다로 이동하여 날을 샜다. 다음날 19일 절이도 앞 바다에서 적선 50척을 불태웠으며 적의 머리 71급을 베면서 승리하였다. 전과로 보아 치열한 해전이었으며, 명 수군이 합류한 후 최초로 벌어진 해전이기도 하다. 이 해전과 관련된 기록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난중잡록, 이순신의 행록 등에 전해지고 있다.

절이도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의 조명 수군 연합진영인 고금도의 침입을 막았으며, 두 달 후 고금도에서 고흥 나로도까지 확장된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해전은 명 수군 참전 후 최초로 벌어졌던 연합해전이었다. 절이도해전은 이순신이 지휘한 50여 회의 해전 중 전과 면에서 노량해전, 부산포해전, 한산해전 다음 4번째 순위이다. 즉 한산대첩과 버금가는 해전이 절이도해전이다.

절이도해전 후 잇따라 8월 초 명나라 유격 계금과 조선 수군이 합동으로 흥양 해역에서 일본군과 해상전투를 벌여 11명을 사로잡고 17급을 참획한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 전투도 이순신의 기록에는 없지만 선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다.

1597년 9월 16일 적선 130여 척을 맞아 31척을 격침시키는 명량해전은 1597년(정유년) 난중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이 해전에 대한 국민의 인식 수준은 높다. 나아가 관련 기관은 홍보와 활용에 막힘이 없다. 반면 1598년(무술년)의 난중일기는 소량으로 전하고 있으며, 7월 19일의 절이도해전 당일의 기사는 전하는 바가 없어 역사 속에 묻혀 있는 현실이다.

절이도(折爾島, 折尒島)는 고흥군 금산면(錦山面)의 조선시대 당시 지명이다. 현지에서는 꺽음도, 거금도라고 부르고 있다. 이두식 표현이 글자로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592년(임진년) 난중일기에는 절갑도(折甲島)로 기록되어 있다. 1592년 4월 22일 '새벽에 정찰하는 것과 높은 곳에서 적을 감시하는 일로 군관 배응록이 절갑도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절이도에는 사화랑(沙火郎) 봉수와 목장성(牧場城), 송봉산(松封山)이 있었다.

거금도란 지명이 1900년 초반부터 사용되면서 절이도 지명이 사라졌다. 절이도해전 관련 사료의 부족도 이유로 들 수 있으나, 절이도 지명이 사라지면서 정유재란 당시 대승을 거둔 절이도해전도 역사 속에 묻혀 있다.

고흥군은 이순신의 행적과 관련된 문헌 자료를 기저로 추출된 역사자원을 토대로 최근 다양한 학술연구 성과를 확보하고 있으나, 다른 지역의 임진왜란 승전지에 비해 관광자원화 사업은 뒤처져 있다. 따라서 고흥과 관련된 임진왜란 역사자원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이를 토대로 한 활용 계획 수립과 실천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 부분에 대한 고흥군과 전라남도의 관심이 더욱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이수경(문화재학 박사, 지역유산연구원장)

절이도해전은 정유재란 때인 1598년 8월 20일(음 7월 19일, 이하 음력 표기) 전라남도 고흥의 절이도[거금도] 부근의 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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