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7>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보물 제1314호) 
① - 국내 최고(最古) 후불벽 뒷면 벽화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나는 백의관음보살 벽화
2020년 04월 16일(목) 13:03

1. 후불벽 뒷면 백의관음도 전경(사진 문화재청)

불전 후불벽 뒷면에 그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

무위사 극락보전의 또 하나의 기념할 만한 최고의 가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불전 후불벽 뒷면에 그려진 관음보살도 벽화라는 데에 있다. 대개 불전 후불벽 뒷면에 백의관음도를 그리는 경우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보편화한 것인데 후불벽화와 같은 솜씨로 보아 조선전기인 1476년경에 함께 제작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현재 남아 전하는 후불탱화(벽화) 뒤 벽면에 그린 백의관음도 가운데 전체적인 구성과 그림의 품격이 가장 뛰어나다. 후불벽은 544년이 지났지만 지탱하는 가구와 흙 벽면이 훼손 없이 견고하다. 흙벽에 천연염료로 그린 그림은 아직도 막 붓을 놓은 듯 선명한 색채에 탄성을 자아낸다.

백의관음과 경배하는 노승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여래삼존벽화(보물 제1313호)의 뒤 벽면 가득히 황토색을 칠한 뒤 비교적 유려하고 간결한 필치로 그렸다. 은은한 머리 광배를 한 백의관음보살을 중앙 가득히 배치하고 몸광배 밖으로 절반 높이 하단 아래에는 일렁이는 파도를 묘사하였다. 백의관음보살이 발밑에 자주색 천 자락을 지르밟은 채 바다 물결 위를 떠 있듯 버티고 서 있으면서 대각선 방향으로 바라보며 공양하는 노승의 모습으로 표현된 선재동자를 보살의 오른쪽 대각선 하단에 배치하여 서로 시선을 마주치게 하였다. 몸광배의 밖 보살상 왼쪽 허벅지 높이에 둥그런 붉은색 구슬이 그려졌고 앞쪽 아래 구석 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었다.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노승은 몸을 숙인 채 손을 벌려 경배하면서 간절한 표정으로 관음보살을 우러러 바라본다. 노승 어깨너머 등 뒤에 앉아 있는 파랑새는 고개를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는 시선의 조응을 이루었다. 관음보살도 화면 우측의 노비구와 파랑새를 자애로운 눈길로 내려다본다. 백의관음보살이 쓴 보관 중앙에는 아미타불을 표현하였다.

보름달 배경으로 빛나는 백의관음

당당한 체구에 간략화된 옷 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 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 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그림으로써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관음보살은 넓적하고 둥근 얼굴 옆으로 긴 눈을 반쯤 내리뜨고 있다. 우뚝한 코 밑에는 '八'자 모양의 수염이나 기다란 귀와 함께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목이 굵고 어깨가 각지고 건장하여 당당한 체구의 건강한 남성 같은 몸이다. 양어깨에 흰색의 천의를 두르고 배꼽에서 묶은 뒤에 발아래로 늘어뜨린 한 자락은 왼쪽 어깨를 지나 머리 위를 둘렀다. 옷 주름도 먹선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였다. 안에 비단 속옷을 받쳐 입었는데 위쪽 끝에는 도안화한 연화문 도장을 촘촘히 찍었으며 그 아래는 짙은 황토색이다. 가슴치레걸이와 어울리는 팔찌도 그렸다. 맨살이 드러난 양손은 배꼽에서 서로 엇갈리게 들고 있다. 왼손은 안쪽으로 중지와 약지를 안으로 오므리면서 노란색으로 표현된 정병을 든 채로 무릎까지 내렸다. 오른손가락은 뒤집은 채 버드나무 한 가지를 엄지와 중지 약지로 잡은 상태로 들어 올려 생동감 넘친다. 남성적인 외모와는 달리 살집이 있는 여린 듯 기다란 손가락과 손톱은 손목에 두른 팔찌에서 풍기듯이 여성스러움이 배어난다.

관음보살은 보름달을 배경으로 밝게 빛나는 모습이다. 머리광배와 보름달은 먹선 위나 주변으로 흰색선과 황색선을 덧칠해 밝게 빛나는 아름답고 찬란한 빛을 표현하였다. 맨살이 드러난 발 주위로 가슴치레걸이를 단 자주색 비단 속 옷자락을 살짝 드러내 보였다. 이는 가슴치레걸이나 팔찌와 함께 소박하게만 그린 흰옷의 밋밋함을 보완하려는 깊은 배려이다.

특히 발 주변에는 세 종류의 옷자락이 보인다. 하나는 발아래 쪽으로 비천상의 흰색 긴 천의(天衣)자락과 발치레걸이를 휘날리며 하강하는 신라 시대의 동종에서 흔히 등장하는 비천상 같은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발목 주변과 위쪽으로는 종아리로부터 흘러 내려온 발치레걸이를 단 자주색 주름진 속옷이며 마지막으로 발아래와 위쪽에 넓게 표현된 옅은 '자주색 천 자락'을 말한다.

이란 영향으로 북서인도에서 성립된 관음보살상과 페르시아 양탄자의 친연성

발아래 바닥에 넓게 깔린 '자주색 천 자락'은 최초의 사례여서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어쩌면 하늘을 나는 양탄자처럼도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흔히 관음보살이 연꽃을 지르밟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무위사에서는 붉은색 페르시아(이란) 양탄자(Carpet) 같은 휘날리는 얇은 천 위에 올라탄 모습이다. 이는 관음보살상이 이란의 종교문화적 영향을 받아 북서인도에서 성립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란의 수신(水神)인 동시에 풍요의 여신인 아나히타가 당시 간다라 지방에서 나나이야 여신 및 아르드후쇼 여신으로 정착되어 있었으므로 관음보살은 이 여신이 불교화된 것으로 추정한다.(이와모또) 관음보살상은 머리 위의 화불(化佛)이나 천관(天冠)을 쓴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모습도 역시 이란의 영향이라고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도 관세음보살이 다른 국토에서 왔다고 했는데 이란의 종교문화적 영향을 받아 북서 인도에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타키브스탄에서 출토된 아나히타상은 물병을 들고 있는데 왼손에 지니고 있는 항아리에서는 물이 흘러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대개 손에 물바가지를 든 관음상은 바로 이러한 여신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돈황(敦煌)에서 출토된 수월(水月)관음상이나 양류(楊柳)관음상 등도 오른손에 버들가지를 들고 있다.

낙산에서 관음을 기리며 찬미하는 게송

보살상 상호 우측에는 5자가 한 구를 이룬 8구 40자의 5언율시가 위아래에 먹으로 쓰여있다. 이 시는 '동문선'(1478년)과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도 등장한다.'동문선'에서는 익장(益莊) 스님이 쓴 시라고 하며 '동문선' 권9 동인시 상편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고려 문신 유자량(庾資諒: 1150∼1229년)이 쓴 '낙산관음찬(洛山觀音讚)'에 수록되어 있다.

海岸孤絶處(해안고색처) 바닷가 높은 벼랑 아득한 곳?

中有洛迦峰(중유낙가봉) 그 가운데 낙가봉이 있었네

大聖住不住(대성주부주) 석가모니불은 머물러도 머문 것이 아니고

普門逢不逢(보문봉불봉) 아미타불은 만나도 만남이 없네

明珠非我慾(명주비아욕) 빛나는 구슬은 내 바라는 바가 아니요

靑鳥是人遂(청조시인봉) 우리가 찾는 것은 오직 파랑새 뿐

但願蒼波上(단원창파상) 오직 바라옵건데 푸른 물결 위에서

親添滿月容(친참만월용) 친히 만월같은 모습 뵈옵게 하옵소서

의상대사 관음보살 친견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묘사

위의 게송은 고려 시대 널리 알려졌던 '낙산 설화(동해안 낙산에 관음이 있다고 하여 의상과 원효가 찾아갔다는 내용의 설화('삼국유사'권3 탑상4)'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선재동자 대신 노승이 표현된 점이라던가 관음보살이 바다 위에서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모습, 노승 어깨너머 등 뒤에 파랑새가 그려진 점 등으로 보아 의상대사가 동해 관음굴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묘사하였다.

백의관음의 왼 소매가 바람에 휘날리는 화살표처럼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는데 그 끝자락에 붉은색 여의주가 놓여 있다. 이는 의상이 용왕에게 받은 여의주를 의미한다. 노승의 시선은 관음의 진용이 아닌 구슬로 향하고 있고 살짝 벌어진 두 손은 그가 곧 구슬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명주(明珠)'는 원상 밖의 홍색구슬로, '청조(靑鳥)'는 노승의 어깨 너머 등 뒤에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해동화엄의 초조인 의상 대사가 낙산에서 관음을 만나 보배구슬을 얻는 극적인 장면을 생생하게 그림으로 전달하려는 의도가 잘 드러난다.

14~15세기 정토신앙과 결합된 백의관음예참신앙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1476년 극락보전에 후불벽이 건립되면서 앞면에는 무량수삼존벽화(1476년)와 뒷면에는 백의관음보살벽화(1476년)가 그려지고 불단에는 무량수삼존상(1478년)이 연이어 봉안되었다. 불전은 영원한 안식처로서 환한 빛이 충만한 서방 아미타정토 즉 극락보전으로 구현되었다. 관음보살은 일반적으로'화엄경'>과 '법화경'에 그 존재의 근원을 두고 있지만 아미타불을 도와 망자의 명복을 비는 것과 영가천도의 신앙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다. 관음보살의 명도구제(冥途救濟)적인 신앙 성격은 14~15세기 간행되었던 <백의관음예참문>에 잘 담겨있다. 중국에서 간행한 <관음예문>은 남북조의 불교를 융합하여 천태종을 창시한 중국의 고승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년)에 의해 정리된 이래 고려・조선을 거쳐 현재까지도 꾸준히 지송(持誦)하는 의례문이다. 관음을 주존으로 참법(懺法: 죄를 참회하기 위한 법회)을 행하는 의식문으로 고통과 환란을 구하는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을 신앙하고 있다. 이에 비해 고려후기 조선초 간행된 <관음예문>에서는 성백의관음보살에게 귀명하여 10악업을 참회하고 궁극적으로는 무량수국에 왕생하기를 기원하고 있어 중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정토신앙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구체적으로 15세기 중엽까지는 <관음예문> 발원 부분에 "회원왕생무량수국(廻願往生無量壽國)"이라 하여 무량수국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다.

중국 원・명대 불전 안에도 무위사 극락보전과 마찬가지로 후불벽을 세우고 뒷벽에 관음보살을 그린 예가 많지만 후불벽의 앞에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보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무위사 극락보전 후불벽에 형상화된 백의관음은 특별히 14~15세기 정토신앙과 결합된 백의관음예참신앙의 한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노비구는 의상대사이자 참회로서 극락왕생을 희구하는 발원자 혹은 왕생자로도 해석할 수 있어 그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구원신앙

무량수삼존후불화는 현생의 사람들이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고 백의관음도는 억울하게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정토사상과 결합된 천태신앙의 한 형태이다. 왜구의 침략과 기근에 억울하게 희생된 혼령들이 난무하던 조선 전기 죽은 자들을 위로하고 산 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구원신앙'으로서 인간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신묘한 벽화 솜씨에 감탄을 넘어서 조선 전기인 1476년경 그린 그림을 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화가인 오도자(吳道玄, 685년~758년)의 솜씨 아니겠냐는 그럴듯한 설화가 회자되고 급기야는 관음보살의 분신인 관음조(파랑새) 이야기도 등장시키기에 이른다.

선각대사 형미부터 효령대군과 수륙사까지

절을 나서면서 지난 무위사의 역사를 더듬어 본다. 선각대사 형미스님이 주석하던 신라하대 후삼국 쟁패기의 혼란한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홀연히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궁예에게 맞서 왕건을 옹호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형미스님의 정치적인 결단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왜구의 노략질로 유리되던 이 땅에 통곡 소리 끊이지 않던 고려말에서 조선초. 억울하게 죽은 혼령을 달래기 위해 효령대군의 지원으로 무위사에 극락보전이 건립되고 이윽고 나라에서 수륙사로 삼자 대대적인 개조를 거쳐 수륙재 전문 특화 불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2. 불단과 후불벽 뒷면(강진무위사극락전수리조사보고서, 1984, 문화재관리국)

3. 백의관음도 전경(사진 무위사)

4. 백의관음도 세부(사진 무위사)

5. 양탄자에 올라탄 백의관음(사진 무위사)

6. 노승과 파랑새(사진 관조)

7. 낙산에서 관음을 기리며 찬미하는 게송(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 사진 】

1. 후불벽 뒷면 백의관음도 전경(사진 문화재청)

2. 불단과 후불벽 뒷면(강진무위사극락전수리조사보고서, 1984, 문화재관리국)

3. 백의관음도 전경(사진 무위사)

4. 백의관음도 세부(사진 무위사)

5. 양탄자에 올라탄 백의관음(사진 무위사)

6. 노승과 파랑새(사진 관조)

7. 낙산에서 관음을 기리며 찬미하는 게송(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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